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역대상 15장 설교말씀] 여호와의 법궤를 메라(역대상 15:10-15)

두란노 서원 2021. 5. 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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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역대상 15장 설교말씀 중에서 여호와의 법궤를 메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지만 법궤 이동에서 1차는 실패했습니다. 웃사가 새 수레에 실어서 법궤를 운반하다가 떨어지는 법궤를 웃사가 잡음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받아 죽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엄청난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이제는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는 것이 아니라 메라고 합니다. 레위 자손이 법궤를 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할 때 문제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메라(역대상 15:10-15)

 

대상 15:10 웃시엘 자손 중에 지도자 암미나답과 그의 형제가 백십이 명이라 

대상 15:11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부르고 또 레위 사람 우리엘과 아사야와 요엘과 스마야와 엘리엘과 암미나답을 불러 

대상 15:1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 15: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대상 15: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1.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

 

세계는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발전한다고 교과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고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세계는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고도 먹고사는 사람으로 나뉘어서 갈등과 투쟁의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보다 솔직하게 오늘의 현상을 표현한다면, 일하지 않고도 일하는 사람보다 호의호식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이 발달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앞으로 쉽게 개선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 더러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운 산업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 수고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마저 조성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2. 수고의 짐이 없으면 위로도 없다.

 

놀고먹으려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사회의 분위기가 온통 유흥적이고, 놀자판 일색입니다. 회사에서도 웬 회식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사회적 흐름이 교회에도 스며들어서 교회에서도 어려운 일을 맡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감소하고 있습니다. 대신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간단한 예로, 교회의 청소나 관리를 성도들이 나누어서 하지 않고, `사찰'이라는 사람을 별도로 두어서 그 사람에게 전담시키는 행위를 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성도들이 나누어지면 어렵지 않은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회들이 그렇게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유희성 프로그램들은 교회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증가 일로에 있습니다.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회적 추세의 반영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할 일이 많은 교회에는 성도들의 수효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일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결국은 그들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만을 가지고 사실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우리의 이해 태도는 현상보다는 본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 태도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3D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요즈음에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가를 검증해 보아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작정 위로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짐도 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했던 당시의 지도층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퍼부으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수고의 짐이 없으면 위로도 없음을 절실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3. 수고의 짐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수고의 짐을 기피하는 이유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임이 없는 삶처럼 건조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아무런 책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책임감에 의해서 활동력을 갖게 됩니다. 책임감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짐이 있어야 활동력을 갖게 되고 움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수고의 짐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며, 활동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특징은 모두가 눈에 초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에 지쳐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당장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짐도 없기 때문에 활동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의욕도 없고 꿈도 없어진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왜 모여서 수다를 떨까요? 그들이 당장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험담이나 늘어놓고,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며, 불평과 불만을 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분열하고 싸우는 것일까요? 교회를 위해서 지금 수고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 컵에는 먼지만이 쌓이는 법입니다.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컵의 사용처는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할 일이 없는 교회는 먼지가 쌓이게 되고 엉뚱한 것이 담기게 됩니다.

수고의 짐이 없는 사람은 위로와 안식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곳에는 오직 불평과 불만만이 있을 뿐입니다. 수고의 짐을 집시다. 되도록이면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합시다. 그것은 못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들이기에 져야만 하는 짐인 것입니다.

[역대상 13장 주일 설교문] 법궤 영입에 실패한 다윗(대상 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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