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요나서 1장 강해 설교문] 네가 어찌하여(욘 1:1-10)

두란노 서원 2020. 8. 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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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나서 1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네가 어찌하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 목 : ( 요나 ) 네가 어찌하여

구 절 : 1:1-10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온통 탄식과 한숨뿐입니. 부동산 값의 폭등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이 무산된 가난한 서민의 한숨소리 너무 비싼 물가 때문에 시장에 저녁 찬거리 사러 갔다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는 주부의 한숨소리 증권시세를 바라보며 대한민국의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쉬는 투자가들 코로나 사태를 바라보며 올 한 해 지낼 것을 걱정하는 서민의 탄식소리 정치권의 분란을 바라보며 불안에 싸인 국민들의 한숨소리.......등 이렇게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도대체 모두가 원치 않는 이 탄식과 한숨소리가 언제까지 계속되겠습니까? 정치인들의 대답은 자기들이 집권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정확한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같이 탄식소리를 듣고 있는 여러분께 오늘 탄식소리 하나를 더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탄식소리는 한 주일 내내 듣는 그러한 탄식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시대와 우리를 향하여 탄식하시는 탄식소리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요나는 주전 9세기경 여로보암 2때 살았던 실제 인물입니다. 어느 날 요나에게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요나는 크게 망설이기 시작합니다. 한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 선지자가 당시 세계를 제패하는 대제국 앗수르에 가서 외친다고 누가 들어주겠습니까? 그것도 조그마한 성이 아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말입니다. 또한 흥한다는 소식도 아닌 망한다는 저주를 외치라니 가보나 마나 그들이 안들을 것은 뻔한 것이요 듣는다 해도 그로 인하여 자기를 죽이려 들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지금의 스페인인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이스라엘 항구인 욥바로 가서 배를 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가만 두지 아니하시고 풍랑으로 개입하셔서 요나가 탄 배가 침몰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배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보려고 각기 자기들의 물건을 버리며 생명을 건져 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자기들의 신에게 빌어도 봅니다. 그러나 풍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선장이 배 밑에 내려가서 버릴 물건이 없나 찾던 중 아무것도 모른 채 잠에 깊이 빠져든 요나를 발견하고는 그에게도 하나님께 빌 것을 말합니다.

 

그래도 풍랑은 여전히 계속되자 당시의 풍습을 따라 이 풍랑이 누구 때문인지 제비를 뽑자 요나가 뽑히게 됩니다. 이때 그들이 요나에게 자세한 이유를 듣고는 크게 두려워하며 한 목소리로 외치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라고 하며 요나를 책망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바로 이 10절 말씀을 통하여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이 책망은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겉으로 볼 때 사공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내면을 보면 결코 사공들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공들의 입을 빌어서 요나에게 향하신 탄식이요 꾸지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말씀하십니. 먼저 성부 시대가 있었습니다. 성부 시대는 직언의 시대와 대언의 시대로 나눌 수 있으며 직언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던 시대요 아담부터 삼대 족장시대까지 대언의 시대는 선지자를 통하여 대신 말씀하시던 선지자 시대입니다. 모세부터 말라기까지- 둘째로 성자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선지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이제는 모든 성경이 완성되었고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는 성령을 보내주셨기에 지금은 성령시대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오직 완성된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때로는 꿈으로, 은 자연계시로, 혹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실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어떡하면 예수를 죽일까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대 제사장 가야바가 나타나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백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왜 생각지 못하느냐?"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 한 사람 죽여서 온 이스라엘 민족이 평안함을 이룰 수 있다면 한 사람 죽이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말은 가야바 스스로 말함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했습니다.

가야바는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 말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무지한 가야바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들어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로,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빌라도가 명하기를 그 죄패에 "나사렛 예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했습니다. 명패를 본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보고 항의하며 "자칭"이라는 말을 삽입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말하기를 "나는 나의 쓸 것을 썼노"하며 그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의 권위가 손상될까 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무 뜻도 없이 이 말을 썼지만 하나님께서는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천하 만민에게 높이 알리기 위해 역사하신 것입니다.

 

렇게 하나님은 때때로 무지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곤 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설교를 통해 꾸짖으시지만 때로는 무지한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꾸짖으실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고 있을 때 베냐민 사람 시므이라는 한 촌노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합니. 이때 군대장관 아비새가 분노하여 시므이를 죽일 것을 간청하자 다윗은 가만두라고 합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인데 내가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이 시므이라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의 입을 통하여 자기를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10절 말씀은 사공들의 꾸짖음이 아니라 사공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꾸짖음이었던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이 말씀은 요나에게만 주시는 책망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예배드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꾸짖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는 이 음성을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성경 읽을 때만 혹은 설교를 들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실패한 환경 속에서도 병들었을 때도 자녀가 잘못되었을 때도 불의한 사고를 만났을 때도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가서는 내게 일어나는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당하는 사건을 통하여 자연계의 역사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범죄 하여 하나님 앞에서 채찍을 맞거든 너 자신도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내게 오는 비난 내가 당하는 불행한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2. 이탄식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탄식하시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탄식하셨는데..........

 

첫째, 이 말씀은 요나의 불순종을 탄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절에 세 가지 동사를 사용하셔서 "일어나라, 가라, 그리고 외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대해 요나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3절에 보니 그는 일어나긴 일어났고 가긴 갔습니다만 외치러 간 것이 아니라 도망하기 위해 간 것입니.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3절 첫머리에 "그러나"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내 생각은 이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을 결심했습니다. 그러한 요나에 대하여 "네가 어찌하여 내 말에 불순종하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지키라 하시지만 "그러나" 렇게 하면 굶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생활이 적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고난의 길이기 때문에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요나에게 하신 탄식의 말씀은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는 "아멘"하고 무릎을 치지만 성경을 놓으면 "그러나"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아멘"하며 소리치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러나"합니다. 성경도 옳고 설교도 옳지만은 "그러나" 나는 내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말에 불순종하느냐?"

 

둘째, 이 말씀은 요나의 무책임을 탄식하시는 말씀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큰 풍랑이 왔고, 배가 파선하게 되었고, 모든 소유를 바닷속에 던지는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바로 요나 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인 요나는 배 밑에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무책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탄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봅시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풍랑은 누구 때문입니까? 가정의 어려움은 누구 때문이며 직장, 교회의 어려움은 누구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혹시 나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요나처럼 무책임하게 "그 누구 때문이겠지" 하며 방관하고 있지는 않았습니? 그러는 이상 풍랑은 결코 잠잠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나 때문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혼란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 때문이라"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는 "나 때문이라"는 귀한 고백을 합시다. 아담은 당연히 "저 때문이라" 했어야 옳았습니다. 만일 그리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와 때문이라고 했고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 결과 인류 역사는 파행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자기 때문이니 내 이름을 먼저 생명 책에서 지워달라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임을 미루는 그 시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네가 어찌하여 무책임하느냐?"라고 탄식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이 말씀은 요나의 무지를 탄식하신 말씀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니 이스라엘만 떠나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그는 하나님이 무소 부재하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만 계십니까? 니느웨도 계시고 다시스에도 계시고 요나가 타고 있는 배 한가운데도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요나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요나는 그저 이스라엘에서만 도망하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탄식하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버리신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외치기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었기에 그는 풍랑을 만나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렇게 무지한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아 언행을 조심하다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마음대로 사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집에도 직장에도 시장에도 계십니다. 따라서 요나에게 하시는 이 탄식의 말씀을 요나와 같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2800년 전의 인물 요나는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모습 죄로 인하여 생긴 결과에 대해 무책임한 모습 이스라엘을 떠나기만 하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무지함 이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 그러므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시는 책망의 말씀은 바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탄식이요 꾸지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나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하나님이 탄식함이 아니라 기쁨의 대상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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