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창세기 2장 강해 설교문] 낙원의 인간과 돕는자 여자(창 2:18-25)

두란노 서원 2020. 8. 2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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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2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낙원의 인간과 돕는 자 여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 목 : 낙원의 인간과 돕는 자 여자

구 절 : 2 :18-25

 

서 론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있다. 둘 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창 1: 1 - 2: 4a의 이야기는 웅장하고 거대한 전우주적인 창조의 서사시를 모사하는 반면 창 2: 4b - 3: 24은 아기자기하고도 아름다운, 그러나 끝내 인간의 타락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단절로 끝나는 작은 범주에 속하는 창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먼저 등장하는 창조 이야기는 P문서 기자의 작품이며 창 2: 4b에 등장하는 것은 J 문서 기자의 이야기인데 이 두 이야기의 묘사와 주된 관심사가 다른 이유는 이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제사 문서 기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가질 수 있는 범우주적인 하나님의 주권이 녹아져 있고 야웨 문서 기자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기록된 양식이면서도 성숙하고 세련된 신학적 양식을 갖추고 기원전 10C의 솔로몬으로 야기된 신앙과 문화의 위기에 직면하여 야웨 신앙의 정신으로 대항했던 그 정신을 가지고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되 하나님과의 단절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살았던 참 인간과 그의 동산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가 살았던 시기의 지혜문학적 영향은 이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에 녹아진 상태로 드러나 있다.

 

야웨문서 기자가 전하는 창조의 이야기는 에덴동산에서 벌어지는 하나님과 사람의 이야기이다. 인간과 신이 함께 거하는 낙원의 표상은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신화 등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창세기에 등장하는 낙원은 다른 신화들과는 달리 신은 그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는 낙원으로서의 에덴이 묘사되어 있다. 이 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과 친교를 나눈다.

 

본문의 구조

본문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사람 아담과 여자의 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먼저 전체 이야기의 구조를 살펴보자. 낙원의 인간도 돕는 자를 필요로 한다

 

I. 하나님의 결심 v. 18

A. 동기 v. 18a

B. 결과 v. 18b

II. 하나님과 아담이 일하다 (I) vv. 19 - 20

A. 하나님이 일하시다 v. 19

1. 짐승을 만드시다 v. 19a

2. 아담에게 데려오시다 v. 19b

B. 아담이 일하다 v. 20

1.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다 v. 20a

2. 돕는 자가 없었다 v. 20b

III. 하나님과 아담이 일하다 (II) vv. 21 - 23

A. 하나님이 일하시다 vv. 21 - 22

1. 아담에게서 취하다 v. 21

a.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다 v. 21a

b. 여자를 만들다 vv. 21b - 22a

1) 아담의 갈비뼈를 취한다 v. 21b

2) 살로 채우다 v. 21b

3)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다 v. 22a

2. 아담에게 데려오시다 v. 22b

 

B. 아담이 말하다 v. 23

1. 고백 v. 23a

2.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주다 v. 23b

IV. 결과 vv. 24 - 25

A. 아담과 여자의 연합 v. 24

1. 남자가 부모를 떠나다 v. 24a

2. 아내와 연합하다 v. 24a

3. 둘이 한 몸을 이루다 v. 24b

B. 연합의 결과 v. 25

 

이 이야기는 인간을 자세히 살피고 그를 돕는 자를 지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일을 한다. 모든 동물들(들짐승과 날짐승)을 흙으로 지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아담에게 이끄시고 아담은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그를 도울 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결과 하나님은 다시 일하신다. 이번에는 아담을 취하여 생명을 만드시는 것이다.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신 하나님은 그것으로 또 하나의 인간, 여자를 만드셨다.

그녀를 아담에게 데려 왔을 때 아담은 탄성을 지르는 것으로 그녀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고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여자는 아담에게서 이름을 받고 이 둘은 한 몸이 된다. 이제까지 보호해주고 인도하고 훈계하고 함께 일하시던 하나님을 떠나 남자는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주석 결과의 해설

 

전통적으로 이 이야기는 여자를 만드신, 그래서 아담과 동일한 지위를 가진 여자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이해되어 왔다. 돕는 자로서 창조된 여자는 다른 창조물들과는 다르게 남자의 몸의 뼈를 기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래서 둘은 동등한 존재이며 다른 부분의 성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여성의 비하적인 표현은 인간성의 왜곡이라는 해석을 낳았다. 창세기를 제외한 성서에서는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사회적 배경 내에서 아버지와 남편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을 묘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여성에 대한 "소유"은 결혼과 함께 남성에게 양도되고 여자는 한 가족 내에서 가족들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여성의 활동은 모두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행하여지는데 분명 창 2: 18 - 25에서의 이야기는 이런 이해를 뛰어넘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본문이 남녀 사이의 partnership얘기하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분명 당시의 문화에 반대되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기에 모든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 그러면 본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문점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

 

첫째, 여자의 등장은 아담의 일 중의 한 부분에 속해있다. 하나님의 선언이 있었지만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게 독립적인 등장을 하지 못한다. 아담의 뼈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녀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손에 이끌리어 아담에게로 나온다. RSV에서는 같은 동사(brought)로 이끄심을 표현하고 있다. 여자를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다르다는 것이겠지만 2차적으로는 아담이 이름을 짓기 전에 그에게 감탄을 털어놓았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인에게는 이름과 소유권은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존재는 하나님과 아담의 행위와 고백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

 

둘째,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에게는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아담은 이름을 말함으로 일을 했는데 그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여자(본문상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그리고 돕는 자로서 여자에게 주어진 일은 아담과 같은 일 즉 이름을 짓는 일이 아니다. 이미 아담에 의해 "모든" 짐승들은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는 여자가 어떤 일을 통해 그를 도울지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셋째,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별자로 구분할 수 있는 이름은 가지지 않았다. 단순히 사람(man)이라 표현되고 여기서 파생된 여(waman)라는 말이 이름으로 등장한다. 특별한 이름이 없다는 의미에서 둘은 동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이야기를 마감하는 24, 25절은 예수께서 결혼을 규정하는 데 사용하신 이래 결혼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이 결론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돕는 배필을 지으시리라는 하나님의 결심 또는 선언은 분명 이 결론과 연관이 있다. 이것이 단순한 결혼과 연합의 문제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로서의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이야기를 마감하는 벌거벗었으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다섯째, 이 이야기는 여자의 창조를 말하고 있으나 무대 정면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남자의 이야기이다. 즉 여자 자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 여자를 배필로 맞은 남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결론 부분에는 여자의 이야기가 등장 하지만 그 속에서는 남자와 함께 복수형으로 등장한다. 즉 여자 존재 자체로서 이야기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상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던 본문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재평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기 218절로 25절에 묘사되어 있는 이야기는 가부장적 사회의 틀에 다분히 대항하는 몸짓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만으로는 일을 완전히 이루어 나갈 수 없다는 사상이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여자와 남자 사이의 구분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된 여자의 존재는 남자에게 속한 것으로 지어지지 못했다 또한 아담에게서 자신의 일부라는 고백을 듣지 못했다면 다른 피조물과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여자는 아담이 하는 일을 돕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담과 같이 하나님과의 교제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일하지도 않았다. 다만 돕는 자로서 지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과 그녀를 취하여 아내로 삼은 아담이 드러날 뿐이다. 결국 현재 우리 현대인의 사고에서 상상이 가능한 독립적인 모습으로서 등장하는 여자의 모습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Man)을 돕는 자로서 여자에 대한 평가는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한 여자를 지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본문의 결론 부분(창 2: 24 - 25)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묘사에 여자의 존재 의미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돕는 배필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여자의 연합을 기술하고 있는 24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남자는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고 둘은 한 몸을 이룬다. 즉 남자는 그가 이전까지 의존하였던 존재를 떠나 자신의 아내와 연합한다. 이때 쓰이는 연합(CLEAVE)은 아교로 굳게 붙이는 행위를 뜻하며 바울은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의 굳은 결속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합함으로 여자와 남자는 한 몸을 이룬다. 한 육체(one flesh)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묘사는 바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신비이다. 그리고 돕는 자로서 여자를 지으셨던 하나님의 의도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몸으로서 가지는 질서와 책임감, 그래서 여자는, 아니 아내는 남편과의 연관 속에서 묘사되는 것이며 이 관계 안에서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연합은 남편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나눌 사람 함께 질서를 이루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인식하고 그가 해야 할 일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 - 다스리는 일)에 정성을 다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실제적인 남녀 간의 종속관계, 또는 우열관계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며 또한 여성의 절대적인 독립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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