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기도자료

[인생 철학 연구] 사주팔자와 궁합에 대하여

두란노 서원 2020. 7. 1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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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두란노 서원을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인생철학 중에서 사주팔자와 궁합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사주팔자(四柱八字)(四柱八字)와 궁합(宮合)

 

사주(四柱)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표시하는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를 말한다. 연월일시마다 각각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사용해서 나타낼 때 8자가 되므로 사주팔자(四柱八字)라고도 한다. ~ 내 팔자야!’란 말의 팔자(八字)도 여기의 팔자이다.

 

사주는 우주에 운행하는 기의 움직임에 대한 운기론에 속한다. 기 사상에서는 인간이 각자 고유한 선천의 기(先天之氣)를 가지고 태어나며, 이 선천지기의 두텁고 엷음에 따라 신체의 강건과 수명, 운명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 선천지기는 부모로부터 부여받지만, 한 편으로는 태어날 때의 우주의 기, 즉 천체의 독특한 배열에 따른 기의 작용에 의해서도 결정 지워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 걸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성경적 권위 하에 복종시켰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세계관을 전개하는데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도 당연히 이 개념들은 성경의 권위에 복종되어야 한다(43:23; 딤전4:4).

 

문제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사용해서 형성된 사상 체계가 성경적 권위와 세계관에 도전한다는데 있다(창3:4-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이런 개념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을 가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상과 우상숭배에 대해 알아본 후 성경에서 이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자.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 걸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성경적 권위 하에 복종시켰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세계관을 전개하는데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도 당연히 이 개념들은 성경의 권위에 복종되어야 한다(사43:23; 딤전4:4). 문제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사용해서 형성된 사상 체계가 성경적 권위와 세계관에 도전한다는데 있다(창3:4-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이런 개념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을 가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상과 우상숭배에 대해 알아본 후 성경에서 이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자.

 

사실 운명 술에서 말하는 대로 자신의 노력과 마음가짐에 의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굳이 운명을 점쳐서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길흉화복을 미리 안다고 하더라도, 단지 최선의 노력을 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노력과 올바른 마음가짐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미래라면 이미 정해진 미래가 아니며, 정해진 미래가 아니라면 미리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롬12:2-3; 전3:11).

 

우리가 미래를 미리 알아서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사로운 마음만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선천적인 운명이 좋다고 하면 교만해지고, 나쁘다고 하면 낙망하기 쉬운 법이다. 교만이나 낙망 어느 쪽이든 사탄이 매우 기뻐하는 것이다.

 

운명론에서의 ()이란 것도 가변적인 확률을 의미하며 운이 좋다는 것은 확률이 높단 의미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사실상 확률의 성취는 언제나 100%가 된다. 운명론의 관점에서는 성취될 확률이 0.1%라도 하나님 뜻 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100%가 된다.

 

하나님 안에서는 확률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고후 5:17; 창1:1). 구약, 특히 잠언과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걸 볼 수 있다(50:19~21; 잠16:1~2, 9, 33, 19:21).

 

인간은 타락으로 총체적 인식 능력을 상실했고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에 처하게 되었다.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에서 기인하는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은 전적으로 타락에 의한 것이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호기심과 욕구도 이러한 불안에서 출발한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은 만유의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창1:1), 오직 한분이신 구원자에게로 돌아갈 때 해소되는 것이다(사43:11, 45:21). 인간이 자신의 죄인 됨과 전적 무기력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때 참된 내적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눅15:20~24). 이 세상 신(고후4:4)인 사탄이 주는 평안은 참되고 지속적인 평안이 아니다.

 

종교 본능(하나님을 아는 지식) 첫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법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심, 또는 종교 본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19)에서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밝히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밝히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눈과 귀로 하나님을 보고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본성 안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제 3의 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만이 가진 영적인 통찰력이며, 종교심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을 찾고 섬기거나, 또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들은 신을 찾거나 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과 가장 닮았다고 하는 원숭이가 사원을 짓고, 신에게 제사하거나 기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계에는 항상 종교가 있습니다. 문명사회에도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도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종교가 있고, 서양에도 종교가 있으며, 또 아프리카에도 종교가 있습니다. 과거에도 종교가 있었고, 지금도 종교가 있으며, 앞으로도 인간 사회에는 종교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위급한 일을 당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한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북한군에게 붙잡혀서 북쪽으로 끌려가다가 삼각산 골짜기에 숨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유엔군 비행기들이 편대를 지어와서 그들에게 폭격을 하고 기관총을 쏘아댔습니다.

그때에 그 청년이 숨어서 보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공산당원들과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모두 나무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소리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급한 일을 당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신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류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고칠 수 없는 종교라는 병에 걸려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심을 부여하셨습니다.

 

) 도덕성(양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능력)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의 법, 즉 도덕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과 간음, 그리고 도둑질을 금지하고, 또한 거짓 증언이나 이웃의 것을 탐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양심이 율법과 같이 선명하게 선악을 구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며,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이러한 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일정한 법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은 다른 짐승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원숭이가 죄를 짓고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인간의 도덕성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양심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양심이 사람들이 태어난 후에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습득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양심 가운데 후천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에 분명히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선천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의 법칙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울은 이 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2:12-15).

하나님은 자연계에 자연법칙을 주셨듯이, 사람들 안에 도덕적인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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