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종려주일 설교말씀] 골고다에서 짊어지신 주님의 십자가(마 27:26-36)

두란노 서원 2021. 3. 24.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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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종려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골고다에서 짊어지신 주님의 십자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 나의 무거운 원죄 때문에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무거운 선택받은 인간의 죄악들을 십자가에 짊어지고 유대인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골고다에 올랐습니다. 이 십자가는 내가 짊어져야 할 것인데 주님이 담당하셨습니다. 나는 절대 감당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켰습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이 나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나의 모든 정욕을 못 박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골고다에서 짊어지신 주님의 십자가(마 27:26-36)

 

마 27: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 27: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마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마 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마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마 27: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마 27: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마 27: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가을의 하늘은 쳐다보기가 즐거워도 삼복의 하늘은 쳐다보기 마저 싫습니다. 그래도 하늘을 쳐다봅니다. 불볕더위를 내뿜는 하늘도 하늘은 역시 하늘입니다. 하늘은 넓고 하늘은 시원합니다. 가뜩이나 무더위로 찌든 좁은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하늘은 더욱 위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늘은 공평합니다. 하늘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하늘처럼 살자 다짐해 봅니다. 하늘처럼 어느 한 곳 치우치지 말고 고루고루 살아보고 싶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면 고슴도치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오래전 TV에서 여자 주인공이 하던 말입니다. 고슴도치는 온몸에 찌르는 가시를 가지고 있는 동물입니다. 사랑하기에는 많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다가갑니다. 가시에 찔려 아파할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 갑니다. 조심조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슴도치는 사랑을 해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세상입니다. 타성에 젖어서 속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고슴도치 이야기는 이런 메말라 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을 촉촉이 적셔주는 이야기입니다.

 

듣노라면 가슴속에 스르르 저며 들어오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합니다. 내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게 해 줍니다. 신중하게 다가가는 여유와 진실된 사랑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여기 고슴도치의 사랑 이야기는 바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 우리 주님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고슴도치의 사랑입니다. 찌르는 가시가 있는 사, 그래서 더욱 조심조심 여유 있게 다가가는 사랑입니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대신 저주의 가시관을 머리에 쓰셨습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관은 여느 가시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자란 날카로운 송곳을 가진 가시입니다.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웁니다. 주르르 생피가 흐릅니다. 그 날카로운 가시관을 이마 깊숙이 짓눌러 씌웠습니다. 온머리가 깨어져 박살이 난 듯 아픔이 가득한 가시관이었습니다.

 

주님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에 쇠 못이 박혔습니다. 살갗이 찢긴 사이에서 생피가 줄줄이 흘러내렸습니다. 저 검붉은 피는 저주의 가시채에 찔려서 흘린 피입니다.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느라고 주님이 흘리신 피입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들이 찌르고 또 찔러서 쏟아내게 하신 핏물입니다. 내 이기심, 내 시기심, 내 자만심이 가시가 되어 찌르고 또 찔러서 흘러 내려오는 핏방울입니.

 

죽음은 다시 살아나는 길목입니다. 사망은 부활의 지름길입니다. 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조심조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 성경을 읽으실까요. 요한 계시록 320절 말씀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주의 조물주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저도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면 받고 주님이 앗아 가시면 뺏기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급하게 주시고, 성급하게 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을 왈칵 열어 재키고 내가 거저 주는 것이니 받아 가지라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가택 침입적 강도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조심조심 문을 두드리십니다. 피 흘린 손으로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시려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가시채에 찔리신 당신의 피 묻은 사랑을 주시려고 주님은 오늘도 문을 두드리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풍성한 사랑이십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몽땅 주시는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만족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주시려고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십니다. 쇠 못에 찔리신 그 손으로 노크하십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그 모습 그대로 서서 노크하십니다. 사랑이 핏물 되어 흐르는 그 정감으로 노크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려고 노크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면 십자가로 다가 서시는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2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누구의 십자가입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무슨 십자가입니까? 십자가는 고통의 의미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내 십자가는 내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사랑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스가랴 136절은 말합니다.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난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두 팔 사이에 난 상처는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요한복음 1513절을 또 보십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의 최고 표현인 것입니다.

 

로마서 1310절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법의 완성입니다. 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주님 사랑의 그늘 속에 안주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듯이 나의 사랑을 그렇게 나타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처럼 나도 그렇게 사랑하며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에서 그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했던 3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방관자들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수혜자들입니.

셋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 십자가의 방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빌라도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회피합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겁한 형의 전형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를 몰라서 회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도 죄입니다. 무지의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십자가를 몰라서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는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의 도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마땅히 베풀어야 할 사랑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 오시는 날 용납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수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소위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왔으나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생각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형제의 사랑이라는 특혜를 입고 자신의 유익은 추구하면서도 나누어 주는 데는 인색합니다. 자기 기준인 세상의 탐욕적인 삶에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 형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주님의 십자가를 팔아서 자기 잇권의 배를 채우는 어글리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며 그 업적은 대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태복은 722절에 보면 주님 앞에서 자기 이력의 찬란한 업적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철퇴 맞을 십자가의 수혜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셋째.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도 생각해 보십시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극도로 피곤하고 쇠약해졌습니다. 가시다가 쓰러지고 일어섰다가는 쓰러지십니다. 그때 군병들은 생면부지의 구레네 사람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우게 하였습니다. 몬은 부지중에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에 힘이 부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법 모든 가치관을 완성하려는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힘으로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힘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에 대하여는 구레네 시몬이 주님보다는 더 세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십자가를 힘으로 진다면 누군들 짊어지지 못하겠습니까? 강권된 사랑은 그만큼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강권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못됩니다. 십자가는 사랑으로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억지 사랑이라도 사랑은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레네 시몬의 경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의 생애는 위대하게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시몬의 기록에 대하여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나 아들은 초대교회 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시몬의 아내는 위대한 바울 사도에게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시몬의 아들 루포는 그 이름만 불러도 모두 알아들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습니.

 

주님은 명령 일변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서시지 않습니다. 랑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사랑은 인내입니다. 사랑은 아량입니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그 상처 난 손길로 오늘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문밖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십니다. 지금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먼저 내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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