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2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중에서 흙으로 아담을 창조한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아직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속 사람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신약에서 속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속 사람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빚어서 겉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담입니다. 그래서 첫 겉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아담 이후로 나오는 모든 인류가 타락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고 나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완전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동물은 속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물은 겉모양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물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겉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속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가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복음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시고 나의 겉 사람도 함부로 살지 말고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흙으로 아담을 창조한 사건(창 2:4-7)
4절은 엘레 톨레도트 하솨마임 베하아레츠 베히바르암 베욤 아쇼트 아도나이 엘로힘 에레츠 베솨마임입니다.
창 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1장에서 하나님의 명칭으로 ‘하나님’(엘로힘 430)을 줄곧 사용하던 모세는 본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예호와 엘로힘 3068 430)을 사용한다. ‘여호와’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보다 2.5배나 더 많이 사용된 명칭이다. 그 두 명칭은 다 하나님의 명칭이다.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는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 같고, ‘여호와’는 그가 영원히 스스로 계심과 사람과 언약을 맺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두 말은 구별 없이 교대로 사용된다. 창조자 하나님은 곧 영원히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창세기에 하나님의 두 명칭이 나오는 것은 두 개의 다른 문서들이 무리하게 합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창세기는 한 사람 모세가 썼다. 물론 모세 이전에도 창조 사건에 대해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들이 있었고 또 어떤 기록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그런 것들을 참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세가 영감 중에 이 내용을 다 썼고 이 내용이 다 진리이며 사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진리의 말씀이다(딤후 3:16).
본문에 ‘대략’이라고 번역된 원어(톨레도트 8435)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 (10:1; 11:10, 27; 25:12), ‘약전’(37:1)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 말은 2장부터 37장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에 걸쳐 사용됨으로써 창세기 저자가 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그가 바로 모세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시대에 책을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5절은 베콜 시아흐 하사데 테렘 아도나이 바아레츠 베콜 에세브 하사데 테렘 이츠마흐 키 로 히메티르 아도나이 엘로힘 알 하아레츠 베아담 아인 라아보드 에트 하아다마입니다.
창 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절은 베에드 야알레 민 하아레츠 베히쉐카 에트 콜 페네 하아다마입니다.
창 2: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얼른 보면, 천지만물 창조의 순서가 창세기 1장에서의 증거와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창세기 1장은 천지만물의 창조를 전체적으로 기술하였고, 창세기 2장은 사람 창조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보충적이다. 여섯째 날에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 초목이라는 원어(시아크 7880)는 ‘떨기나무(관목)’를 가리킨다. 초목이나 채소는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지만, 그것들이 아직 들판에 두루 퍼진 것은 아니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마타르 4305 동사이다. 히필(사역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이다. 히필형은 하나님께서 비를 전혀 내리지 않았다는 의미다. 완료 시제이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비가 내린 적이 없다. 이 비가 내린 것은 노아 시대에 내렸다. 그전까지는 하늘에서 비가 내린 것을 인간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비를 내려 심판하신다고 하니 노아의 말에 사람들이 웃기다고 했던 것이다.
땅을 갈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이 창세기 1장에는 이미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창조의 부연설명이라고 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땅을 갈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없다는 단어를 보면 아인 369라는 부정 부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완전히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있다. 이것이 속 사람이다. 그런데 겉 사람이 없다. 여기에서 아인은 현재 이 땅에 겉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속 사람은 이 땅에서 땅을 갈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흙으로 겉 사람인 아담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창조되어 있다. 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테렘 2962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뜻은 ~전에, 아직~아니, ~하기 전에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이미 창조된 채소들과 초목들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흙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새싹들이 겨울에는 죽어 있다가 봄이 되면 흙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의 눈으로 아직 보이지 않을 뿐이지 때가 되매 흙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럼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데 이런 채소와 초목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해답은 안개이다.
안개라는 단어는 에드 108인데 뜻은 안개, 수증기, 샘물이라는 뜻이다.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안개로 인하여 또는 샘물로 인하여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또한 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었다.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했는데 적시다는 단어가 샤카 8248이다. 마시다, 물을 대다, 물을 주다는 뜻이다. 안개가 촉촉이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는 말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안개를 통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7절은 바이체르 아도나이 엘로힘 에트 하아담 아파르 민 하아다마 바이파흐 베아파이브 니쉐마트 하임 바예히 하아담 레네페쉬 하야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다. 여기에 ‘사람’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담(120)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그의 형상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生氣)’라는 원어(네쉬마트 하임)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이다.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육체의 숨을 쉬게 하셨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때에 영혼이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창세기 1장에서는 바라라는 창조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무에서 유의 창조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여기에서는 야차르 3335 유에서 인테리어처럼 형성하는 창조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흙으로 겉 사람을 창조하여 숨을 쉬게 한 것을 말한다. 육체의 심장을 뛰게 하셨다는 의미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산 자가 되었다’라는 뜻이다. ‘생령’이라는 원어(네페쉬 하야)는 ‘생물’ 혹은 ‘생명체’라는 뜻이다. 이것은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영혼이 들어가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창세기 1:20, 21, 24에서는 ‘생물’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공중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나 땅의 짐승 등을 가리켰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속 사람을 창조하시고 2장에서는 겉 사람을 창조하셔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셨다. 속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지만 타락한 인간인 겉 사람은 이 세상을 자꾸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내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계속해서 싸우게 된다. 바울도 이것 때문에 고민했다. 나의 속 사람인 영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라보는데 나의 겉 사람인 육체는 죄악을 짓고 세상만 바라보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속 사람이 이겨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몸을 만드셨다는 것은 몸도 소중히 여겨야 할 요소임을 보인다. 몸은 저급하거나 더러운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이다. 우리는 몸이나 물질세계를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천사같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육을 가진 존재이다. 장차 부활 때에도 사람이 영으로만 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화롭게 변화되는 육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잘 먹이고 잘 보살펴야 한다. 몸을 위해서는 적당한 영양 섭취와 수면과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몸을 학대하거나 몸을 병약하게 하는 것은 건전한 생각이 아니다.
사람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우 약하다. 넘어지면 살이 찢어지고 터져 피가 난다. 심하게 넘어지면 뼈에 금이 간다거나 부러지기도 한다. 사람의 몸은 범죄 한 이후 더욱 연약해졌다. 그래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또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노쇠해진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43은 현재의 우리의 몸을 ‘약한 몸’이라고 표현했다. 또 고린도후서 4:7은 우리 몸을 ‘질그릇’이라고 말하며, 4:17은 우리의 겉사람이 후패하며 낡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여성들의 몸은 연약하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7에는 여성을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몸보다 더 소중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으로 만드신 영 혹은 영혼이다. 군대로 비유하면, 영은 사령부요 몸은 예하부대이다. 영은 생각하고 느끼고 결심한다. 마음은 곧 영의 활동 양식이다. 몸은 영의 지시와 마음의 결심대로 행동한다. 사람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고 또한 영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사람도 영을 가졌다. 사람이 영적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유물주의(唯物主義), 즉 하나님이나 영을 부정하고 세상에는 오직 물질만 있다고 보는 사상은 무지하고 허무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상이다.
사람은 영이 강건하고 평안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의 건강을 위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사람의 영의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다. 죄는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의 길을 걷는 자의 심령은 항상 평안하다.
사람의 영은 몸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면 몸도 평안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로운 삶 가운데서 심령으로 평안하고 강건할 때 몸도 건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3:7-8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라고 했고, 잠언 18:14는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했다.
사람은 영과 육의 두 요소가 결합된 존재이며 그 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다. 또 그 두 요소는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의 평안도, 몸의 건강도,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신명기 32:39에는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했고, 또 출애굽기 15:26에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라고 말씀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알고 몸도 소중히 여기자.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학대하지 말고 잘 먹이고 보살펴야 한다. 적당한 영양 섭취와 적당한 수면과 적당한 운동은 몸을 위해 선한 일이며 그런 것을 낮추어 볼 것이 아니다. 특히 남자는 여성의 몸이 연약함을 알고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이 몸보다 더 귀함을 알고 영의 건강을 위해 힘써야 한다. 죄로 죽었던 영이 중생하였다. 이제 영의 건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계명을 순종하며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살 때 얻는다. 사람은 밥만 먹으면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그 말씀을 통하여 평안과 힘과 용기를 얻는다. 또 우리의 영은 육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라고 말했고 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했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몸도 영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몸도, 영도 다 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건하게 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고(갈 5:16), 또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고 말한다(딤전 4:7-8). 우리는 경건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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