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요한복음 3장 강해설교말씀] 세례 요한의 증거(요 3:22-36)

두란노 서원 2023. 1. 8. 13:58
반응형

요한복음 3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역이다.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고 했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전하고 자기는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나타나야 한다.

 

세례 요한의 증거(요 3:22-36)

 

Ⅰ. 예수께서 유대 땅으로 가서(22절) 제자들과 함께 유하셨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이후, 예수는 마치 처가 없이 많은 여행을 하신 것은 그이 겸손을 나타내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바울은 "가끔씩 여행"을 했다. 예수는 많은 전도 여행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셨다. "의(義)의 빛"이 하늘 끝에서 나와 하늘 끝까지 운행하신다(시 19:6).

2. 그는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으셨다. 비록 그가 예루살렘에 자주 출입하셨지만, 여기서처럼 즉시 다른 지방으로 돌아다니셨다. "이 일 후에," 즉 니고데모와 사적으로 이야기를 한 후, 유대 땅에 가셨다. 그 땅은 아직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초라함을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보잘것없고 미미한 장소이지만 훌륭하게 쓰였다. 뉴스의 근원지이고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은 예루살렘은 그의 가르침과 기적들로 "소란"했을 것이나, 거기서는 아무 선도 행하지 않았다.

3. 그가 유대 땅에 갔을 때 "그의 제자들이 따라왔다." "그가 시험에 처해 있을 때에도 계속해서 함께 한"자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지만, 시골로 따라가지는 않았다. 다만 제자들만이 시골까지 따랐다. 언약궤가 옮겨지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그 언약궤를 따라 좇는 것이 낫다.

4. 유대 땅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머물면서," 사적으로 "이야기하기도"하고 "가르치기도"하였다. 그는 안정과 휴식을 취하려고 시골로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과 좀 더 자유스럽게 이야기하려고 갔었다(아 7:11, 12 참조).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그와 함께 머물" 준비도 해야 한다. 예수는 그곳에 5,6개월 정도 거주하신 것 같다.

5. 예수는 그곳에서 "세례를 베푸셨다." 세례를 통하여 자기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지녔던 정직과 용기가 보다 더 크도록 하셨다. 요한이 유대 땅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으므로(마 3:1), 예수도 거기서 베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요한이 "내 뒤에 오실 분이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서 제자들이 준 것이다(4:2). 그렇지만 이 제자들의 세례는 예수가 주신 세례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례 베풂이 비록 제자들에 의해서이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허락을 받았다.

Ⅱ. 요한은 옥에 갇히기 전까지 계속 세례를 주었다(23,24절). 여기서는 다음을 듣게 된다.

1.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었다." 요한의 세례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세례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 그리스도는 "요한이 쇠하기"전에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요한이 쇠할 때 요한의 제자들을 받아들여 전도 사업을 계속 순조롭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요한과 같이 위대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물러 설 때 자기들의 의치를 맞아서 계승하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2) 요한은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지만 계속해서 자기도 그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요한 자신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속적인 선포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은 계속해서 증거 했다. 요한은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므로, 하늘의 철회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증거 해야 했다. 이전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한이 증거 했는데 그 증거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날 때까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찾아가지 아니했다. 이전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한이 증거 했는데 그 증거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날 때까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찾아가지 아니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었다. 갑의 더 큰 은총이 을의 노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손이 동원되어야 할 충분한 일거리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사명에 책임을 가지고, 그 사명이 다할 때 "끝까지"완수토록 노력해야 한다.

2. 요한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는데, 그 장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 장소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든, 요한은 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즉 요한은 요단강에 어떤 이점(利點)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요한은 그곳에 머물면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다시 물이 있는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의 기회를 잘 좇아야 한다. 요한은 물이 많은 장소를 택했다. 즉 개울이 많은 장소를 찾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기꺼이 세례를 줄 수 있도록 많은 물이 있는 장소를 택해서 소기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요한이 세례를 준 곳은 물이 "많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3. 거기서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공적인 전도를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는 않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것은 요한과 예수의 세례를 둘 다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마음이 하나이듯 세례도 하나였다는 것이다.

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되어 있다(24절). 이 구절은 순서상 마태복음 4장 12절 이전에 와야 한다. 요한은 갇히기 전까지 자기의 일을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생이 짧다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보다 더 열심이었던 것 같았다. 즉 그는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지만," 멀지 않아 밤이 올 것을 알았다(9:4).

Ⅲ.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 사이의 결례"에 대한 변론이 나온다(25절). 그리스도의 복음이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주려 왔음을 알라.

1. 변론자들이란 "요한의 제자 몇몇과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은 회개의 표지인 그의 세례를 거부하고 있었다.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이 죄 된 세상을 분열시키고 있다. 이 변론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공격자로서 유대인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신중함보다는 열성을 가진 초심자임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흔히 경솔한 자들에 의하여 상처받곤 한다. 그들은 그 진리를 변호할 수 있기도 전에 벌써부터 그렇게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2. 변론의 문제점은 "결례"이다. 즉 정결 의식이다.

(1)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선생의 세례가 "가장 뛰어나다"라고 유대인들의 모든 정결 의식을 보완시키며, 완전케 하는 것으로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미숙한 초심자들은 자기들의 재능을 과시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그 찾은 진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감추어 두어야"하며, 그 진리에 대하여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2) 의심할 여지없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쓰는 정결 의식, 즉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또 장로들의 전토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결의식을 주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신의 보증이고 장로들의 전통은 교회의 관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론에서, 요한의 세례가 탁월한 특성과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핑계로 요한의 세례를 반대했을 것이며, 그래서 결국 본문의 불평이 나왔을 것이다(26절). 유대인들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곳에서 세례를 준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그만큼 칭찬했던 요한의 세례는 다음 둘 주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① "이런 것은 교회와 국가의 평화를 위해서는 위험스럽고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것은 끝없는 분열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볼품없는 선생을 세운 셈이다."

② 혹은 "이런 것은 기껏해야 잘못된 것이고 불완전하다. 그들의 주장처럼 요한의 세례가 옳다면, 건너편에서 행하는 예수의 세례가 더 낫다. 너희 세례는 이미 더 큰 빛에 의하여 어둡게 되고, 조만간 사라지고 만다." 이 같은 반대는, 마치 아이 때와 성인 때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건물의 상부가 토대와 상충하는 것처럼, 복음의 빛을 그 자체의 발전과 대립되게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와 상충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서로가 잘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Ⅳ.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세례에 대하여 자기 선생에게 한 불평을 보자(26절). 세례에 대한 상충의 이야기에 당황되어 화가 나고 분개한 자들이 자기의 선생 요한에게 찾아가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니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3:26).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변론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이때에 일어났다. 변론에 열중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엉뚱한 사람을 헐뜯게 된다. 이게 바로 사람들에게 흔히 범하는 일이다. 만일 이러한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에 대해 변론하기 전에 "세례의 교리"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화나고 분개함이 없이도 적절하게 답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불만이 있지만, 그들은 자기의 선생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하고 있다. "랍비여," 그러나 비록 그들이 이름을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구세주를 경홀히 여기고 있었다.

1.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 주심을 주제넘은 일로 생각했다. 제 마음대로 하는 세례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례는 이 장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주고 있던 요한의 특허권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세례는 그가 발명한 특허품인가? "요단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던, 당신의 제자를 보십시오. 당신이 세례 주는 것과 똑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주예수의 자발적인 겸손이 때때로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야기시켜 비난을 받기도 한다.

2. 그들은 그것이 요한에게 배은망덕한 짓으로 여겼다.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줍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가 요한에게서 존경받을 만한 특성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아직도 요한이 예수보다는 훌륭하다는 선입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를 가지고 계셨다(5:36). 그는 요한에게 받은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에게 더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경우가 흔히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결코 징계가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개혁이며 요한의 세례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데 불과하다.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그의 증거를 따르도록 요한의 전도를 더욱 칭찬하셨다.

3. 그렇게 되면 요한의 세례가 빛을 잃게 되리라고 요한의 제자들은 추측한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우리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에게 모여들므로 우리들도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모여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까지로 보아서 그리스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 뚜렷한데도, 어째서 요한의 제자들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길까? 과거의 어느 시대에서나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인들과 성직자들에게 치욕을 가져왔던 것은 영광과 존귀의 독점 때문이었다. 또한 이권의 다툼, 그리고 대립과 경쟁의 질투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사와 은총이 그리고 그의 역사하심과 그 역사의 유용성이 반대를 통하여 위축되거나 비난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기의 뜻이 따라 각자의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베푸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무슨 방도로 하든,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전파를 막는 방법까지도 그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기뻐했다(빌 1:18). 선택하고 역사하심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가 기뻐하시는 그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영광을 독점하려고 탐해서는 안 된다.

Ⅴ. 자기 제자들의 불평에 대한 요한의 대답이 있다(27절). 제자들은 자기들의 불평에 요한이 동조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은 요한에게 너무 당연한 기대였다. 다시 말하면 놀람이 아니라 갈망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제자들의 불평을 제지하고 이스라엘에서 자기가 차지했던 모든 관심과 존경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요한의 이러한 대화에서, 예수의 사역자들은 모두가 자신을 겸손하게 나타내고, 주 예수만 드러내는 훌륭한 표본을 보게 된다.

1. 그리스도와 비교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는 요한(27-30절). 사람들이 우리를 높여줄수록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위치와 됨됨을 생각하고, 겸손해져야 하며, 자만과 자기 과시의 유혹 그리고 우리의 존경받음에 대한 친구들의 질시도 경계해야 한다(고전 3:5).

(1) 요한은 하늘의 처분에 따르고, "복종"한다(2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약 1:17).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각종의 직책이 주어지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각종의 재능이 부여된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다(히 5:4). 우리의 육적인 삶의 행위들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것처럼, 영적인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그리고 필연적으로 의존된다. 여기에 다음의 이유가 나와 있다.

① 어째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시시"할 수 없는가? 여기에 대하여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가 "하늘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자기를 능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러준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면 그의 제자들이 그것에 대하여 시기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유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과 행운을 더 주신다고 한다면 그 사실에 대하여 불쾌히 여기고, 하나님은 불공정하고, 현명하지 못하며, 국부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마 20:15 참조)

②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은사와 유용성에서 뒤져 있더라도, 그들의 탁월성에 시기심을 품거나 "불만을" 갖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요한은 자기가 선생으로, 예언자로, 또는 세례를 주는 자로 된 것은 하늘의 자연스러운 은사인 것으로 알고 있다. 즉 그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이제 그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었다면, 그것은 역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는 자란 허락된 것만 취할 수 있는 자이다. 또 요한은 "영속적인"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일시적인"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즉시 끝난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완수했을 때에, 자기가 쇠퇴됨을 만족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 구절에 대해서 아주 색다른 의미를 주고 있다. 즉 요한은 제자들과 같이, 자기의 세례가 그리스도의 나타남과 관계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아주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자기 뒤에 오신 그리스도가 아직도 자기보다 뛰어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말을(3:27)했다. 그러나 결국 스승인 요한보다 그리스도가 점점 뛰어남에 제자들은 질투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에,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무익한 일이 되고 만다. 복음을 이해하고 믿도록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사람도 복음의 가장 작은 것도 알지 못하며, 복음의 가장 확실한 것도 믿지 못한다.

(2) 요한은 전에 자기가 증거 했던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29절). 요한은 거듭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에게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거는 아주 확고하고 꾸준한 것으로써,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그의 태도는 대제사장들처럼 불쾌한 표정도 아니고, 자기 제자들처럼 우쭐거림도 아니었다.

① 이것은 자기 제자들의 불합리한 불만을 책했다. 자기의 선생이 예수에 대해 증거 한 내용을 제자들이 말했다(26절). 요한은 "자, 내가 증거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라. 그러면 흠잡기 좋아하는 너희의 마음이 찾아낼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너희들은 그때 나를 그와 대립하는 것처럼 여겼는가? 나는 그 앞에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어째서 너희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겨지는가?"라고 말했다.

②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대등한 위치에서 비교할 만한 "건더기"를 제자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을 범할 모르기 때문에, 특히 행할 때, 제지해야만 한다. 요한은 자기가 메시아라는 소망을 자기 제자들에게 고무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분명히 그 반대라고 했다. 그것이 그에게 안심을 가져다주었다. 권위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하나의 구실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면 "속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해로운 격언이다. 그들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3)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출에 아주 만족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자기의 제자들은 실망했지만, 그는 기뻐했다. 그는 이 기쁨을 훌륭한 비유로써 나타내었다.

① 그는 구세주를 신랑으로 비유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사람들 모두가 신랑에게 가는가? 그곳이 아니면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신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독차지했는가? 그가 아니면 누구가 그렇게 해야겠는가? 그것은 신랑의 권리이다. 신부는 신랑에게만 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도 신랑으로 예언되었다(시 45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본성의 차이가 "혼인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었지만, 죄의 더럽힘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신부로 맞으신다. 그래서 교회를 자기의 신부로 사랑하시고 교회의 약속을 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종속되어 있다."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그에게 헌신하는 한, 신랑도 신부에게 그만큼 하신다.

②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하면서, 그를 시중 하고, 그가 존경과 예배를 받도록 하며 교회와의 결혼을 수행토록 그를 도우며, 그에 대한 복음을 전하며, 그를 대신해서 진력하며, 이 결혼이 계속되고 있음을 기뻐했다. 그리고 모두가 절정에 세례를 주었던 모든 것은 그를 안내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오셔서 그가 원하는 것을 하셨다. "신랑의 친구는 서서 그의 음성을 듣고 잇다." 즉 서서 그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신랑의 친구인 요한은 오랫동안 기대했던 결혼이기 때문에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쁨이 충만하였다."

첫째, 신실한 사역자들은 신랑의 친구로서, 사람들의 사랑을 그에게 전하야한다. 즉 신랑의 친구는 대리인이기 때문에 신랑에게 소식을 주기도 하고 그의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 일에 신실해야 한다.

둘째, 신랑의 친구들은 "서서,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 지시들을 받고,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해야 한다(고후 13:3). 이것이 "신랑의 음성"이다.

셋째, 믿음과 사랑 안에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시키는 것이 선한 사역자들이 모두 바라는 기쁨의 충만이다. 그리스도의 결혼 날 친구의 마음이 기쁘다면(아 3:11). 신랑을 사랑하고, 신랑의 존귀와 그 나라의 왕성을 바라는 신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4) 요한은 바른 고백을 했다. 그리스도의 "명성과 능력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30절). 만일 요한의 제자들이 주 예수의 위대함이 점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긴다면, 그들은 시기와 경쟁에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더욱더 슬픔을 당하게 된다. 요한을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① 요한은 점점 퍼지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보고"아주 기뻐했다." "그는 흥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모일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여명과 같이 그리고 겨자씨와 같이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② 요한은 자신의 인기가 쇠하는 이런 결과에 대하여 결코 불쾌하지 않았다. "나는 쇠하여야 한다." 피조물의 탁월성이란 이런 것이므로, "쇠하여야 한다." 나는 완전함의 한 목표를 깨달았다."

첫째, 장차 그리스도 영광의 광채가 다른 영광의 모든 광체들을 실추시킨다. 그리스도와 겨루려는 이 세상의 영광과 육적인 영광은 이 세상에서 쇠하고 사라지지만,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은 흥하고 점점 퍼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도 그리스도에게는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여명이 밝아지므로 새벽별 빛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둘째, 우리의 낮아짐과 모욕당함을 통해서 최소한 그리스도의 이름이 흥하게 된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러한 일을 감수하고 만족을 얻어서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

2. 여기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며," 그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오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말며, 그들 스스로가 그에게 간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1) 요한은 "존귀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31절). "그분은 위로부터 오셔서 만물 위에 계시는 자이다."

①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임을 알고, 수태 이전에 이미 지니고 있던 신적인 본성까지도 증거하고 있다. 우리에게 하늘의 뜻 혹은 하늘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줄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은, 하늘로부터 오신 그분 이외는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하시려고 그를 "내려 보내셨다."

② 그런 까닭에 요한은 그의 나라도 추론하고 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다. 이러한 그와 우열을 다툰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주 예수의 존귀함을 말하게 될 때, 그 존귀함은 우리의 개념과 표현의 모두를 넘어서고 있으므로, 단지 우리는 그가 만물 위에 계시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여인 중에서 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라 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의 신적인 권위의 박탈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만물 의에 계신다." 이 말은 어떠한 사람도 그와 우열을 다툴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세상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육을 입으셨다. 그의 출생지는 이 세상이며 그의 양식도 이 세상에서 구했다. 또한 그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관한 일이고, 그이 관심은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첫째, 인간의 기원은 이 세상으로, 첫 사람인 아담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욥 33:6).

둘째, 그러므로 인간의 제도도 "세상적이다." 인간의 육은 연약하고 죽을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도 부패되고 세상적으로 되었다. 예언자들도 사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성질의 인간들이다. 비록 그들이 자신 속에 훌륭한 비밀을 지니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육으로 지음을 받았다. 이렇게 육을 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우열을 다툴 수 있겠는가?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은 서로 우열을 다툴 수 있겠는가?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은 서로 우열을 다툴 수 있겠지만, 하늘로부터 오신 그와는 우열을 다툴 수가 없다.

(2) 탁월하고 확실성이 있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요한 보다 더 숭배되고 따르게 됨으로써 요한의 제자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이유의 타당성을 자기 제자들에게 말라하고 있다.

① 요한은 자기의 역할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또 무리들에게 이야기했다. 자기는 "땅에 속했다"라고 한다. 예언자들도 마찬가지다(고후 3:5). 예언자들과 요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볼 때 얕고 평범했다. 하늘이 땅보다 훨씬 높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그들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볼 때 그렇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 것을 말씀하시나,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는 "하늘의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②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뿐만 아니라 교훈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활동한 어떤 예언자들보다 월등하다. 어떤 사람도 그와 같이 가르친 사람은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교훈이 우리에게 권장되고 있다.

첫째, 전혀 오류가 없이 "분명"함으로 잘 받아들여진다. "그는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증거 하신다."(32절). 여기서 관찰해 보면

a.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식이 있다. 그는 자기가 보고들은 것만 즉 그가 완전히 알고 철저하게 정통한 것만 증거하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본성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낸 것은 그가 그것을 알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는 것은, 간접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증거 하는 것은 그들이 직접 보고 들었던 사실이 아니라, 천사들의 도움에 의하여 꿈과 환상으로 안 것을 전한다. 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로써 "증거에 양보하라. 그리고 임무가 주어질 때까지 잠잠하라."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 각자 자유스럽게 믿고 안 믿고 할 수 있는 철학적 가설이나 새로운 개념처럼 의심스러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다. 그 계시 자체가 영원한 진리이고, 우리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사이다.

b. 그의 거룩한 은총과 선함을 보자.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이 거의 우리에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그것을 알려 주었다. 바울도 낙원(셋째 하늘)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기지 못할 말이지만(고후 12:4). 그리스도는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을 말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그의 증언을 말하는 것으로

(a) 그의 증언의 확실성은 소문에 의하여 들려지는 소식이 아니라, 법정에서 진술된 증거처럼 심사숙고와 확신에 찬 진술임을 말해 준다.

(b)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애정이 넘치는 그의 진지함이, 사도행전 18장 5절처럼 그이 관심과 때를 통하여 입증되었다.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교훈의 "확실성"에서 요한은 때를 얻어

[a] 대부분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한탄했다. 비록 그가 전혀 오류가 없는 진리를 증거 했지만, 어떤 사람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듣지도 안고, 염두에 두지도 않고 신용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요한은 놀라움과 슬픈 일로써 말하기를, "그러한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주가 우리의 증거를 믿겠는가? 사람의 가장 위대한 임무가 차므로 어리석고 둔하다. 제자들도 적이로구나!)고 했다.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을 슬퍼했다(26절).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아주 많으나 사람들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슬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거의 없다고 여기었다. 죄인들의 불신앙은 성도들의 슬픔이다. 바울의 큰 근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롬 9:2).

[b] 그는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의 신앙을 이 기회에 칭찬했다.(비록 적은 무리이지만)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우리가 확약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참되신다. 하나님이 참되신다면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된다. 하나님의 진리가 도움을 받으려고 우리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신앙에 의하여 그의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우리 스스로가 존귀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스스로가 존귀하심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가 예와 아멘이다. 믿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멘이라 대답한다(계 22:20처럼).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의 증거는 함께 있다(계 12:17).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우리는 인침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의 모든 약속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게 대하여,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우리 선조들과 약속하신 것을 모두 지켰고, 어느 것 하나도 지키지 않은 것이 없다(눅 1:70; 행 13:32, 33). 둘째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약속은 모두 진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에다 우리의 목숨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그가 진실하심에다 우리의 목숨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그가 진실하신 분으로 여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행복을 누리려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단념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심히 존경하고 귀해 여긴다.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분에게 존경을 돌린다."

둘째,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사람들에게 천거된다. 이 천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추천이 아니고 그를 보내신 이의 추천이다(34절).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는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고, 또한 전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한량없이"주셨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하늘로부터 소식을 가져오는 사자들과 같지만, 그리스도는 하나의 대사의 자격으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대사로서 활동하셨다. 때문에

a.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 인간의 약점을 발설하지는 않았다. 그의 본질과 언어는 거룩하시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 증거 했기 때문에(3:2), 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탁으로써 말하는 선지자들과 "신앙의 정도에 따른"예언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b. 그는 어떤 예언자도 예언하지 않았던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에게 할량 없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람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다(고전 2:10, 11). 구약의 예언자들도 "다소" 성령을 받았다(왕하 2:9, 10).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성령을 주셨지만(고전 12:4), 그리스도에게는 "한량없이"주셨다. 다시 말하면 그 안에 성령이 충만하여 한이 없으시다. 그에게는 성령이 그릇처럼 제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샘처럼, 한없이 길은 바다처럼 간직되어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의 한정된 방식으로 성령을 받고, 어떤 특정한 것만 말하며, 흔히 자기 말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항상 성령이 무제한으로 내주 해서 그의 선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라고 휘트비(Whitby) 박사는 이야기하고 있다.

(3)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능력과 권위"는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탁월하며, 그의 명성도 마찬가지이다.

① 그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다(34절). 그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신다. 예언자들은 종으로서 신실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신실하시다. 그들은 종으로서 봉사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사랑을 받으며,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자이다(잠 8:30).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주 기뻐하시며, 그를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사랑하시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굴욕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랑하셨으며, 그가 굶주림과 곤경에 빠져 있을 때에도 계속해서 사랑하셨다.

② 그는 "만유의 주(主)"이다. 자기 아들에 대한 사랑의 확증으로써 "아버지는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 사랑은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시소 확신을 가지셔서, 자기 아들을 인간에 대한 신뢰로써 수령자로 세우셨다. 그 아들에게 하량 없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에게 만물을 맡기셨다. 그것은 그 아들이 주인으로서 만물을 다스릴 자격이 갖추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인 중보자 속에 만물을 다 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귀이며, 모든 그리스도의 모든 권세가 설명된다(마 28:18). 모든 피조물이 그의 발아래 있고, 구원의 모든 사건이 그의 손안에 있다. 고로 그는 만유의 주이다. 천사들이 그의 종들이듯, 마귀들은 그의 포로들이다. "그의 상속물로 주어진 이방인들," 곧 모든 인간들에게 권능을 나타낸다. 또한 하늘나라도 그의 통치를 받고 있다. 그는 위대한 전권대사로서 화해 계약의 조건을 정할 수 있으며, 위대한 입법가로서 교회를 다스리시며, 위대한 시물(施物) 분배 관리임을 물을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손에는 황금으로 된 홀(笏)과 철로 만든 막대를 가지고 있다.

둘째, "모든" 은혜 전달의 통로인 그의 손안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려는 선한 모든 것, 즉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나님이 우리 손에 이러한 것들을 주시기에 우리가 무가치하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의 분노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수탁자로 정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려던 것들을 자기 아들의 손에 주었다. 그 아들은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데, 하나님에게서는 권위를 그리고 우리에게서 호의를 받을 만하다. 모든 은혜가 그의 손에 주어졌고, 또한 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에 대해서 하나의 커다란 격려로, 새 계약의 풍요가 그만큼 확실하고, 애정이 깃들어 있으며, 그만큼 흡족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주시며, 자기에게 그 모든 것을 간구토록 하신다. 하나님과 신자들 모두가 그에게 맡길 만큼 그는 능력이 있다.

③ 영원한 행복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만물보다 선재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36절). 요한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관하여 증언했던 요약이 이 구절로써, 또한 그의 모든 일이 결론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이런 권위를 주셨다면,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신앙으로 존귀함을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의 증언을 믿고, 그의 말씀을 선하고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다. 받는다는 것은 준다는 것의 적절한 대답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 말씀이 그의 복음의 요체이다. 여기서

첫째,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축복 상태를 보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a.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특성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으로 그가 말씀하신 것을 참되게 믿으며, 그를 따르고, 그 안에서 확신을 갖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이익이란 영생에 못지않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치르시어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하셨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불멸하는 영혼의 행복과 같다. 이제까지 믿음이 진실한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 즉 그들은 현재도 얻었을 뿐 만 아니라 앞으로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a) 그들은 영생에 대한 아주 좋은 보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증에 의하여 영생이 그들에게 확실하다. 즉 이 영생이 그들의 보호자의 손에 있어서, 아직은 그들의 소유로 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영생을 얻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

(b) 그들은 현재 하나님과 그 사랑의 증표자인 그리스도와의 사귐에서, 영생에 대한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은혜란 이미 시작된 영광이다.

둘째, 불신앙자들의 비참한 상태. "그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불신"과 "불순종"을 뜻하고 있다. 불신앙자란 그리스도의 교훈을 신뢰하지 않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a. 그들은 이 세상에서와 앞으로 올 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그들은 영생, 즉 그리스도가 주실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영생을 맛보지 못할 것이며, 영생에 대한 어떤 만족할 만한 기대도 갖지 못할 것이고, 결코 영생을 알지도 못해서 더욱 자신들을 타락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b. 그들은 비참하게만 된다. 불신앙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영생인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는 정녕코 죽음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다. 율법을 어김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자들은, 복음의 은총에 의하여 그 진노를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면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매일매일의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며, 항상 그 진노에 머물러 있다. 그에게는 과거의 부채가 해결되지 못한 채, 또 새로운 부채가 증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심판의 날을 늦추거나 지연시키지 않고 하루하루를 준비하시고 계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는 나타날 것이며, 그날을 비장(秘藏)하고 계신다.

[신약히브리어 로마서 6장 말씀] 죄에서 해방된 성도의 삶(롬 6:15-18)

 

[신약히브리어 로마서 6장 말씀] 죄에서 해방된 성도의 삶(롬 6:15-18)

로마서 6장에서는 죄악에서 해방된 성도에 대해서 말씀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했다.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도는 죄

drn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