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고난 주간 설교] 예수님의 죽음과 바라바의 석방(마 27:11-25)

두란노 서원 2024. 3. 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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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고난 주간 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 대신에 강도의 괴수인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 형을 선고받고 골고다로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올라가서 손과 발에 대 못에 박혀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바라바처럼 죄인이었습니다. 이 죄인이 살아나고 예수님이 나 대신 죽었습니다. 고난 주간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에 감사하는 고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바라바의 석방(마 27:11-25)

 

.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그리스도 27:11-25

이 본문에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생긴 일이 나타난다.

1.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11-14)

(1) 빌라도의 심문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며(11). 그는 재판관 앞의 죄수처럼 총독 앞에 섰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심문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 빌라도의 기소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이든 유대인의 왕이 틀림없을 것이며 그가 로마의 권세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유대인들에게 통치권을 회복시켜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께서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로마의 멍에에 반대하는 것처럼 그를 고소했다.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에게 예수가 스스로 그리스도로,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한다는 사실을 확신케 했으므로 로마 총독은 그가 국가를 전복시킬 뿐 아니라 로마 정부까지 멸망시키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네가 왕이냐'

(3) 그리스도의 답변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이 말은 곧 "네가 뜻하는 것과 다르긴해도 네가 말한 대로다. 즉 내가 왕이긴 하지만 네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왕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4) 증거 : 대제사장들에게 고소를 당하되(12). 빌라도는 그리스도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다'(눅 23:14). 그들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그의 죄를 나타내는 것이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소란과 난동으로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

(5) 핍박자들의 고소에 대한 그리스도의 침묵 :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그것은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여 그들의 고소를 반박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의 때가 왔으므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의 때가 왔으므로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빌라도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어떤 대답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13).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악의가 없는 빌라도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 해명하기를 바랐으며 또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침묵을 기이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가 그리스도의 침묵에 화를 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그는 아주 이상한 일처럼 그리스도의 침묵을 '심히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2. 백성들의 격분과 난동(15-23)

백성들의 이런 행동은 총독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강요했다. 대제사장들은 흥분한 무리들의 힘으로 그들이 실행할 수 없었던 목적을 달성했다. 여기에 무리들의 격분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두 가지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다.

(1) 그들은 예수보다 바라바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예수보다는 오히려 바라바가 석방되기를 원했다.

1) 유월절을 맞아 죄수 한 명을 석방함으로써 유월절을 빛내는 일은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로마 총독들의 관례였던 것같다(15절).

2) 우리 주 예수의 석방을 위하여 경쟁하게 된 죄수는 바라바였다. 그는 여기서 '유명한 죄수'로 불리고 있다(16). 민란과 살인과 강도 이 세 가지는 보통 공권력으로 처벌되는 범죄 가운데 가장 큰 범죄들이었다. 그런데 바라바는 이 세 가지의 죄를 모두 범한 자였다(눅 23:19, 18:40). 그는 진정으로 '유명한 죄수'였던 만큼 그의 범죄도 아주 복잡했다.

3) 총독 빌라도가 제안을 했다(17).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제안을 한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 아무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한 핍박이 악한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권세로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백성들의 선택을 통하여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의 양심과 백성들을 모두 만족시키고자 했다. 이와 같은 기교나 속임수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기쁘게 하려는 자들의 공통된 행동들이다.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했다.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그가 석방시키려고 제안했던 이 예수가 그들 가운데 있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메시아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빌라도가 이처럼 예수를 놓아주려고 노력했던 것은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들이 성을 내게 된 것이 예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불과 수일 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을 때 '호산나'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빌라도가 안심하고 이 문제를 백성에게로 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4) 빌라도가 이처럼 그 일을 고심하고 있을 때 그는 그의 아내로부터 경고의 전갈을 받고 예수를 정죄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19). 우리는 여기서 빌라도의 아내에게 이 꿈을 보이신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주목해야 한다. 그녀는 이전에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경건한 귀부인'(13:50) 중한 사람으로서 상당한 종교적 감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녀는 자기가 꿈속에서 애를 많이 썼다고 말했다. 그녀는 악몽을 꾸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꿈으로 말미암아 자기 남편에게 이러한 경고를 보냈던 빌라도의 아내의 세심한 주의를 살펴보자.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이 말은 우리 주 예수께서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는 명예로운 증거였다. 주 예수의 동료들이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원수들을 통하여 주 예수께 호의적인 말을 하도록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유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무죄를 고백하게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 빌라도로 하여금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고 선언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여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그리스도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빌라도의 아내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보이도록 했던 것이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마옵소서' 라고 한 그녀의 말은 빌라도에게 상당히 큰 경고를 두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수한 방법을 통해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억제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된다. 우리가 그런 억제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또한 우리의 중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빌라도의 부인은 빌라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경고를 했다. 그녀는 빌라도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일을 하도록 하면서도 경고를 주자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더 가까운 사이거나 그들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들을 더욱더 걱정해야 한다. 가장 훌륭한 우정은 영혼을 염려하는 우정이다.

5) 대제사장 장로들은 이때 백성들로 하여금 바라바의 편을 들도록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20). 이처럼 그들은 성난 백성들을 조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성들은 예수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대제사장들이 시키는 대로 백성들이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보다 바라바를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진정 이 악한 대제사장들을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수중에 있는 큰 권세를 야비할 정도로 악용했다. 백성들의 지도자가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 것이다. 진정 그 기만당한 백성들에 대해 우리는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이 이처럼 격렬하게 심히 큰 악을 행하도록 내몰리는 것을 보시고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15:32)라고 말씀하셨었다.

6) 이처럼 대제사장들의 선동에 위압되어 백성들은 마침내 대제사장들이 원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빌라도는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다. 그는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이 달성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백성들이 '바라바' 라고 대답하자 그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적이거나 신앙적인 모습을 가장한 사람들이 이와 같이 놀라울 정도로 광적이고 이처럼 무서울 정도로 악한 죄를 범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들어 그들을 아주 통렬하게 비난했다. '너희가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3:14).

(2)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열려하게 주장했다(22,23). 무리들이 바라바를 선택 한 것에 놀란 빌라도는 그들에게 '그러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라고 물었다(22). 그러자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라고 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를 원했던 것은 그것이 가장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처벌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와 맺은 관계에 대해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고자 했다. 무리들의 악의와 분노는 그들로 하여금 질서와 예절을 모두 망각해 버리도록 만들었으며 공의의 법정을 난폭하고 소란스러우며 선동적인 집회로 바꾸어 놓았다.

짧은 시간 동안에 부리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보자. 그가 나귀를 타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그는 아주 상당한 칭송을 받으셨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 대적이 전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그가 떳떳한 보습으로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 오자 그는 상당한 증오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전혀 지지자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 변화하는 세상에는 이와 같은 변화들이 존재한다. 천국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길도 우리 주님의 길처럼 그럼 변화 속에 드러나는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고후 6:8)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다.

무리들의 이 요구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 살펴볼 수 있다.

1) 빌라도는 이 요구를 어떻게 반대했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23). 재판관이 사형 선고를 내리기 전에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주 예수께서 행악자로 고소를 당했지만 그의 재판관과 핍박자들이 모두 그에게서 아무런 악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주 예수의 영광을 더욱 높이는 것이었다. 그가 이처럼 상처를 입고 또 우리를 속죄하고자 그 스스로 자기를 내어 준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면 결코 악한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한 적도 없었던 한 사람의 이 엄청난 고통들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섭리의 공명정대함과 일치될 수 있으며 또한 적어도 이와 같이 공명정대한 섭리가 세상 속에서 행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2) 무리들은 이 요구를 어떻게 주장했나.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그들은 그리스도가 행한 어떤 악을 나타내는 데 힘쓰지 않았으며 또 옳건 그르건 상관없이 무조건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만 힘썼다. 주님의 비유속에 나타나는 바 의로운 선고를 내린 불의한 재판관(눅 18:4,5)처럼 이 불의한 재판관은 무리들의 끈질긴 요구에 지쳐 부당한 선고를 내리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무리들의 소란 때문에 부당한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3. 죄를 떠맡은 백성들과 대제사장들(24, 25)

(1)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죄를 모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24). 그의 논쟁을 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느꼈다. (1) 그가 말한 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아무 효험도 얻지 못했다. 욕망과 분노의 물결이 때때로 얼마나 거센지 보라. 권위나 이성으로도 그 물결은 억제되지 않는다. (2) 오히려 그가 말한 것은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였다. 즉 그는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조짐을 보았던 것이다. 이 무도하고 잔인한 백성들은 더욱더 소리를 지르면서 빌라도에게 그가 자기들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것이라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유대인들에게 닥쳐올 그 민족의 멸망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들의 난폭하고 격앙된 기질로 말미암아 더욱 촉진되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빈번한 폭동은 로마인들로 하여금 그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도록 자극했으며 또한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질적인 분쟁들은 그들의 원수들로 하여금 그들을 쉽사리 정복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대제사장들은 특별히 유월절에 그리스도를 죽이게 될 경우 민요가 일어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하려는 빌라도의 노력이 오히려 그 유월절에 민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처럼 군중들의 감정은 불확실한 것이다. 이 사태는 빌라도를 그 자신의 평안과 예루살렘의 평화 중 한쪽밖에 선택할 수 없는 큰 궁지로 몰아 넣었다. 만일 그가 거룩한 공의의 법을 확고부동하게 지키고 있었다면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않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도 안되며 또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단체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부당한 일을 행해서도 안된다. 빌라도는 이 일을 조정하여 백성들과 자기의 양심을 모두 충족시키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그는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것을 시인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일을 조정하려 했던 것이다.

이제 빌라도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그 죄를 모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 징표에 의한 방법 : 빌라도가…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24). 이 말은 그가 손을 씻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진 죄를 깨끗이 하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이 일에 대한 그 자신의 무죄를 밝히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미지의 살인죄로부터 유대 나라의 결백을 입증하는 데 사용되도록 명령된 율법의 의식을 차용했다(21:6, 7). 그리고 그가 이 의식을 사용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2) 말에 의한 방법 : 그는 말을 통하여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 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그리스도를 정죄해 놓고 자기는 그의 피에 무죄하다고 주장한다면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실행해 놓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자기들의 양심과 반대되는 죄를 범했다고 선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백성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너희가 당하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곧 "너희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그 죄에 대해 책임지라"고 한 것이다. 죄는 선머슴과 같아서 어느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죄를 전가할 사람만 찾아내면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만에 빠져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죄를 전가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대제사장들은 '네가 당하라'말함으로써 유다에게 그 죄를 전가하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 빌라도가 다시 '너희가 당하라'고 말함으로써 그 죄를 대제사장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2)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그 죄를 자기 자신들이 떠맡는다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모두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라고 말했다. 한창 격분해 있었던 그들은 자기들의 수중에 들어온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 죄를 떠맡는데 동의하여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릴찌어다'라고 외쳐댔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의 무죄를 보장해 주려 했다. 그러나 파산을 해서 거지가 된 사람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떠맡을 수 없다. 어떤 피조물이라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죄인으로 묶이고자 하는 것은 대담하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의 후손에게까지 하나님의 분노와 보복이 임하도록 빌었다. 그리스도는 최근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23:35)고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도 부족하여 여기에서 어떤 피조물보다도 귀한 피를 흘리는 죄이면서 가장 무거운 죄를 떠맡겠다고 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비정할 정도로 자신들에게 죄가 임하도록 빌고 있는지 보라. 그들은 이 죄에 대한 처벌이 그 자신들 뿐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임하도록 빌었다. 스스로 처벌을 받으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처벌을 자손들에게까지 부과시키는 것은 지극히 야만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이 그들의 자손과 가족에 대해 어떻게 해를 끼치는가 보라. 그 때로부터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자기들에게 임하도록 빌었으며 따라서 잇달아 심판이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이 피가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임했다. 그들은 회개하고 믿는 순간 하나남의 자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상속으로부터 해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의 약속은 또한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우리보다도 더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에게 좋은 분이 되신다.

[민수기 29장 10분 설교문] 나팔절, 대속죄일, 장막절 제사(민 2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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