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믿음에 관한 설교말씀]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믿음

두란노 서원 2024. 3. 2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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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믿음에 관한 설교말씀 중에서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위를 주장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있기에 믿음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의가 드러나는 행위를 주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믿음

 

으로 모든 구원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며, 믿음으로 성화되어 가며,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등의 말씀이 이런 점들을 잘 보여 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오게 하고 충당하는 도구이며 통로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함에 우리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적인 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이 질문에 애해 저는 먼저 부정적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믿음이란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은 확률이 아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믿음이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 어느 곳에서도 항상 믿음을 경험하는데,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서 단 하루도 넘어갈 수 없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듭니다. “당신은 울산에서 서울로 간다면 당신은 믿음을 즉시 경험할 수밖에 없다. 엔진에 대하여, 기관사로 철로에 대하여, 정비사에 대하, 볼트와 너트 등에 대한 믿음 말이다혹은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탈 경우 그는 믿음을 경험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기계적 가능성의 법칙에 근거한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울산에서 서울로 사고 없이 기차를 타고 갈 것이라는 확률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때때로 철도 사고들이 있지만 그런 사고가 날마다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기계적인 가능성은 아마도 이번 기차가 사고 없이 나를 이동시켜 줄 것이라는 점을 말합니다.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을 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습니다. 그는 기계적인 가능성의 법칙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99세였고 사라는 89세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소망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기계적인 가능성의 법칙은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었는데 바랐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것이라고 말했던 챨스 웨슬리의 말이 적절한 대답일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믿음의 구성요소

우리는 이제 매우 중요한 질문은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요소들은 무엇인가 혹은 믿음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1. 믿음이란 확신(belief)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 자체가 의미하는 것처럼 확신함이 없이 당신은 믿을 수 없습니다. 확신이란 진리에 대한 찬동, 즉 당신 앞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동을 뜻합니다. 우리가 믿음이란 확신이라고 뜻한다고 말할 때 단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나 혹은 찬동이 아니라 우리가 확신하는 확고한 신념입니다.

2. 자신을 헌신하는 신뢰(comfidence)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단지 진리에 대한 찬동으로 정의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찬동을 믿음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것에 대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신뢰라는 요소를 포함합니다.

3. 헌신(commitment)이라는 요소를 포함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한 발자국 전진해야 합니다. 믿음은 또한 헌신이란 요소를 포함합니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믿고 의지할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확신은 하나님을 부르게 만들며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만듭니다.

역사적인 믿음

지적인 찬동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때로 역사적 신앙이라고 불립니다. 역사적인 믿음이란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 항상 성경을 배우고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혹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떤 학교에 참여했다는 이런 이유 때문에 지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이런 믿음에 있는 경우 그것만이 모든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것만이 삶의 유일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것 모두를 합리적으로, 한 진리의 체계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입장에서만 머물 뿐 더 나아가 그런 진리들을 신뢰하거나 그런 진리들에게 자신을 헌신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성경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이지만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지도 않고 사는 남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딤후3:5)입니다. 슬프게도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진리들을 지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헌신한 적이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믿음은 단순히 확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제일 중요한 질문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폈던 것처럼 일시적인 믿음으로 기술한 역사적 믿음의 문제 때문이며 나아가 성경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 자라지만 쉽게 죽어버린 것은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방법으로 말씀을 듣고 즐거운 마음으로 믿기 시작하나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곧장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에서 기술된 사람들 또한 일시적인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제시해 왔던 것처럼 그 대답은 믿음이란 전 인격, 전체 생각, 마음 그리고 의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가방 안에 무엇을 나르는 그런 지적인 확신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며, 또한 손으로 앞과 뒤로 다룰 수 있는 그런 무엇도 아니라, 당신 전체를 사로잡은 무엇입니다.

샌드만(sandman)

18세기 말고 19세기 초에 교회에 큰 피해를 입혔던 "샌드만"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이란 단지 사람의 지식을 밝혀주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로마서 10:9절의 말씀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난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렇게만 한다면 만사가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음과 같이 진술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것이 바로 그의 가르침이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옳은 것으로 믿도록 설득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이나 마음 그리고 의지의 문제에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지적인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의 굴레를 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와 유사한 가르침들이 있음을 유의해서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분에 대한 전제 혹은 지적인 동의 이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낮을 따라 밤이 오는 것처럼 그것도 따릅니다. 당신이 진정 주님을 믿는다면 당신에게 그분은 보배이며 당신은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주님을 향한 애정이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믿음에는 감정이 포함됩니다. 단순히 감정만 있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아예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움직여야 하며 당신은 회개와 기쁨의 눈물이 없이는 오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당신의 확신에 의해서 당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감정주의(emotionalism)는 항상 피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의지 역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세상적인 삶을 여전히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여전히 세상적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외치는 자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니라”(약2:26).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97:10)고 말합니다. 당신이 악을 미워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함께 발생합니다. 당신은 악을 떠나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시편 51편과 139편에서 다윗을 보십시오. 성경 모든 부분에서 그것을 살펴보십시오.

믿음이란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지는 항상 포함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의지가 포함되지 못한다면, “네 저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달리말하면, 오늘날 강조해야 하는 것은 믿음이란 단순히 확신주의(believism)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확신주의에는 마음이나 의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러나 제가 반복하지만 믿음에는 전 인격이 포함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어떤 부분도 제외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 전체를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당신은 확신과 신뢰와 헌신에 합당한 것이 바로 지성과 감성과 의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답은 믿음이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이 믿음에는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전적으로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저는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이며 동시에 복음적 회심자였던 위대한 파스칼(Blaise Pascal)의 진술을 당신에게 인용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이성의 최고의 성취는 바로 이성의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이성은 어떤 관계입니까? 믿음은 단순히 이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서에 반대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비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지워진 부담감입니다.

믿음은 이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성에 반대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초이성(super-reasom)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이성은 우리가 이성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그 지점에까지, 계시에 복종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깨닫는 그 지점에까지 우리 자신들을 이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의적으로 나 자신을 성경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철학적으로 해석하기를 거절합니다. 또 어떤 질문들을 하는 것도 거절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정신과 이성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위대합니다. 그것은 너무 신령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 사실을 수락만 할 뿐 질문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중생하였음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표시들 중의 하나는 질문들을 멈추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어린아이처럼 다가가서 그것을 수락하면, 그때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성은 여러분을 성경 안으로 데려갈 수 없지만, 일단 여러분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면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이 함께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이성의 문제라면 단지 대단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믿음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비합리적이라면 지성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가 이 계시를 수락하면 그때 우리는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이성과의 관계입니다.

믿음과 지식의 관계

이것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음에는 지식의 요소가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진리의 작용의 결과로써 생기는 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부분적 이해(apprehending)와 완전한 이해(comprehending)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는 당신이 어떤 것을 펼쳐놓고 그것을 당신의 머리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분적이 이해란 머리로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지식적인 요소가 부분적인 요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반드시 완전한 이해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혹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믿고 있느냐고 물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질문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믿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공평하고 의롭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죄가 무엇인지 또한 우리가 죄인인지 그리고 회개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을 구원자이시며 구속자 그리고 유일한 분으로 보지 않는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은 바로 저의 죄책감입니다. 따라서 저는 죄와 저의 사실한 상태 그리고 무기력함의 교리에 대하여 분명해야만 하며,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도 그리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복들을 받고 싶다는 공허한 바람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런 복음, 이런 하나님의 말씀, 이런 메시지, 사도들이 선포했던 이 진리, 그들이 썼던 이 진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믿음은 이런 것들을 받아들임이며 또한 찬동하는 것입니다. 저를 움직여 무언인가 하도록 설득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것이 무엇이며, 제가 믿는 분이 누구이며, 그분에 관하여 제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 것들, 즉 드러난 본질적인 것들 혹은 믿음의 본질적인 모습에 속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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