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예수님 말씀은 말씀이 육체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고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고스 성육신 신앙의 현대적 의의(요 1:1-14)
1969년 8월 중순 화란 유학 길에 성지를 순례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 중 하나인 베들레헴, 유대의 수많은 마을 중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을 찾아 아기 예수가 나신 곳에서 무한한 감개에 사로잡힌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상상되는 곳에는 성전이 있는데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과 그의 모친 헤레나(Helena)가 4세기에 건축했고 그 후 파괴되었다가 6세기에 다시 개축되었다고 합니다. 이 성전 꼭대기에는 성탄을 알리는 징글 벨이 있고 지하에는 아기 예수의 모형과 구유가 있어 매일 수많은 관광객, 순례자들이 물밀듯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성전 입구는 매우 낮고 적은데 그 이유는 이교도들이 말을 타고 쳐들어와 경배자들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전설에 의하면) 아기 예수가 나신 지점이라고 생각되는 동굴은 지하로 몇 계단 내려가서 있었는데 길이 39피트, 넓이 11 피드, 높이 9 피드이며 현수 램프에 의해 밝혀져 있었고 벽은 주름 잡힌 포장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정면에는 화려한 제단이 있었고 거기 큰 은색 별에는 라틴어로 "여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구유는 대리석 그릇으로 장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잘 보호되어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향을 피우는 등(불) 이 계속 불붙고 있었고 많은 순례자들이 와서 무릎을 꿇고 돌과 제단에 키스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가 있는 자리는 베들레헴 시장 근처인데 이 동굴은 베들레헴 여기저기에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석회암으로 된 돌 언덕, 쉽게 깎을 수 있어서 누구나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위해....
베들레헴은 아름다운 계곡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이 계곡에는 옛날 다윗왕 시대에도 그랬지만 예수님 때에도 풀이 있어 양 떼들이 살았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치다 가브리엘의 음성을 들은 곳도 여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그림과 같은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2,000여 년 전 이 보잘것없는 마을, 여관 구유에서 탄생한 아기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으며 경배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며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려 했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그를 말하고 그를 믿고 있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6장 15절에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나 하느냐?" 하셨습니다. 이 질문 이후 특히 19세기 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예수전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얻은 것이 예수전 연구의 재료로 삼은 신약성경이 예수에 대한 전기적 기록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적인 전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초대교회 성도들이 인간 예수를 존경한 나머지 그를 구제주와 하나님으로 추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적인 유일신관에 입각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 전체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지만 특히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한 말씀이 이를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육신이 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한 "말씀"은 희랍철학적인 개념이 아니요, 동시에 그가 말한 "육신"의 개념도 그저 육신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존재를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며 시간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말한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이 역사를 이루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바울의 증거와 같이 그는 일정한 시간세계에 사셨고 일정한 역사적 환경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은 성장과정을 밟았습니다. 먹었습니다. 잠잤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고난을 당했습니다.
곤욕, 굴욕을 맛보았습니다. 채찍에도 맞았습니다. 재판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착한 선생이라 했을 때 오직 한분 하나님만이 선하다고 하셨습니다(막 10:18).
반면에 그는 신적 권세를 행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눅 9:59)라고 선포했고 자기 자신의 결단이 곧 신의 결단이라 했습니 (마 11:6).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임재한 곳에 천국이 임했다고 했고(눅 19:1-10). 또 신적 권세로 죄 사함의 선포와 자신의 神子됨을 자처했습니다(마11:27).
1. 어디에서 우리는 예수 자신이 자신을 교정하신 일을 볼 수 있습니까?
2. 병자를 고치실 때 거의 고치신 일이 있었습니까?
3. 예수의 도움을 받은 자 중에 누가 "그는 나를 조금 도와주었다"라고 말한 자가 있었습니까?
4. 예수께서 어떤 봉사에 늦으신 일이 있었습니까?
5. 예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도움 이상으로 거절하신 일이 있었습니까?
6. 예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도움 이상으로 거절하신 일이 있었습니까?
7. 어떤 경우에든지 예수님께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신 일을 본 일이 있었습니까?
8. 예수께서 자제하지 못하신 일이 있었습니까?
9. 어떤 일에든지 자기 자신의 안락을 먼저 생각하신 일이 있었습니까?
10. 그가 싫증이 나서 그의 일을 수행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까?
11. 예수께서 어떤 사고를 저지른 일이 있었던가요?
12. 어떤 일에나 학대받고 그 때문에 성내고 덤빈 일이 있었습니까?
13. 사람들이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고 고소한 일이 있었습니까?
14. 실망하고 포기하는 일이 있었던가요?
15. 언제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까?
16. 자신을 위해 이적의 능력을 행했습니까?
17. 그를 시험하고 괴롭히는 자들의 질문 앞에서 "좀 생각해 봐야 하겠다"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이 예수에게는 인간적인 겸비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고귀성이 있었고 역사적인 그 예수가 바로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로고스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신 체 그에게는 여분인 인간 존재가 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땅바닥까지 낮아져서 부끄러움을 당하기 위한 성육신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로고스 성육신을 몰랐고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빛이 세상에 비취되 세상이 알지 못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도리어 거리낌이 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귀중한 것이 그들에게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도 남는 사랑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세력이 역사하기 시작하면 상대적인 세계 안에 절대적인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며 거기에서는 미래의 세계가 창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어린 아기 예수의 손에는 온 지구가 가벼운 탁구공 같이 쥐어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기 예수만이 모든 사람의 고통과 죄, 그리고 그들의 죽음까지 담당할 수 있는 구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이 아기 예수 주 그리스도를 모심이 없이, 또 우리 자신이 이 주님의 종이 되어 주께서 남기신 고난의 사업을 담당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성육신의 복음으로 정화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성육신의 현대적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히브리어 원어성경] 고침 받은 맹인의 신앙고백(요 9: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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