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장에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구하였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땅만 버린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눅 13:6-9)
누가복음 13장 6-9절 말씀입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수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의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이 비유는 누가복음 13장 1-5절에 대해 예수님이 해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6절 말씀 서두에 누가는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라는 말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5절 말씀까지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신 말씀으로 주신 두 가지 예가 나옵니다.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제물로 섞었음을 고했습니다. 빌라도의 죄를 고발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하면 "결단코 그 사람들이 죄가 더 있어서 그렇게 피를 흘림을 당한 것이 아니라"하시고 계속해서 "실로암에 망대가 넘어졌을 때에 열여덟 사람이 죽었는데 그 망대에 깔려서 죽은 사람이 너희들보다 더 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다. 너희들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된다"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말씀을 다 하신 다음에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누가는 계속해서 이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에 유대 사람 3천 명을 빌라도가 학살했다는 내용이 나와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2만 명을 한꺼번에 학살한 사건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제물로 섞었다는 이 말의 역사적인 신빙성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관념 속에는 정상적인 수명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그 가족의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을 때에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참 죄가 많은가 봐요. 제가 잘못이 많은가 봐요"라고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저께 어떤 집사님 한 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 아들이 속을 많이 썩여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 분이었는데 저를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해요. "우리 아이들이 다 잘 됐는데 막내 하나가 이렇게 속을 썩이는데 아무래도 제가 죄가 많은 모양입니다. 제가 잘못하는 것이 아무래도 많은가 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고 제가 똑같은 얘기로 그분에게 권했습니다. "절대로 죄가 많아서 그런 보응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 아들이 잘되었다고 하면 내가 죄가 없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아들 다섯이 있어 아들 다섯이 다 잘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죄가 없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 아니면 `특별한 고민이 있다'라고 말할 때에 `우리가 죄가 많아서 그렇다'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죄가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가 우리 죄의 결과라고 결부시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더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회개치 아니하면 너희들도 그렇게 된다"라고 하심으로써 오늘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무화과나무'가 여러 번 나타납니다. 성서에서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무가 무화과나무인데 성경말씀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무화과나무는 창세기 3장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람들이 타락했을 때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다"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참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엮은 옷의 재료가 무화과나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 주셨다. 말씀합니다. `사람이 지은 옷은 무화과나무 였지만 하나님께서 지은 옷은 가죽 옷이었다'는 것이지요.
특별히 오늘의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죄와 옷이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죄를 짓기 전까지는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단 종파에서는 우리 옷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결과이니 우리 죄를 다 회개하고 사함 받은 사람들은 옷을 벗고 삽시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전부 벌거벗고 예배를 드리는 이단 사람들이 미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죠. 사람들이 옷을 입는다. 물론 근원으로 올라가면 죄를 지은 다음에 옷을 입었지만 만일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옷을 입지 않았겠는가 생각됩니다. 어찌 되었든 죄의 결과로 무화과나무로 죄를 가리게 되었다. 옷을 지어서 입게 되었다,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죄를 회개하는 촉구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재미있는 대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에수님께서 수난의 마지막 주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 사건과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열매가 없기 때문에 말랐다고 하는 그 말씀은 상징적으로 이 말씀을 이루신 것이 아닌가 봅니다. 참으로 특이한 점은 여기 본문 말씀은 이루신 것이 아닌가 봅니다. 참으로 특이한 점은 여기 본문 말씀은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만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누가만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그 부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간에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3년 동안 와서 보았지만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과수원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찍어 버리겠다. 어찌해서 땅만 버릴 수가 있겠느냐?" 그때 과수원지기가 "금년에는 그대로 두소서, 만일에 내가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해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때 찍어 버려도 되지 않습니까?" 주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마음속에 다시 한번 간직해 봅시다.
첫째, 이 비유는 포도원에 심기운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리가 나무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9장 9절에 보면 "내 포도원에 두 종자를 심어 섞어 뿌리지 말라" 말하고 있습니다. 한 포도원에 포도의 두 종자를 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에 보면 포도원의 노래라는 재미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울을 다 두르고 술틀을 만들고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아주 좋은 종자를 심었는데 그다음에 열매가 맺힌 것을 보니 극상품 포도가 맺히더라는 말입니다. 그때 주인이 "내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 열매가 맺힘이 어찜인고" 한탄의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극상품과 들포도의 두 종자를 함께 섞어 포도원에 뿌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말입니다만 유대 사람들은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서 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같은 유실목을 심는 것은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도 포도원에 가보면 유대사람들은 무화과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성경말씀을 볼 때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이요, 들포도는 죄지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백성들, 좋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타락해서 거둘 때 보니 죄지은 백성들이 되었더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호세아서 9장 10절을 보면 "내가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열매를 봄같이 하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마치 무화과나무 같구나"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에 이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알짜 이스라엘 백성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가치 있는 나무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번영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된 나무를 말할 때에 무화과나무라 일컬었습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는 굉장히 생산력이 좋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1년에 세 번은 무화과를 딸 수 있다고 그래요. 우리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 나라 기온에서는 그렇게 무화과 열매가 잘 맺힌다고 합니다. 실제로 무화과나무는 4월과 5월을 제외한 1년 내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생산성 때문에 포도나무가 잘 안 된다 하더라도 무화과 열매를 딸 수 있도록 포도원에 무화고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떤 형태이건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매를 거두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포도나무이든 아니면 무화과나무이든 많은 열매를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 말씀 속에서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백성들 가운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가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선민으로서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특권이라는 것은 항상 책임을 수반합니다. 어떤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 권리 속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남다른 특권이 있다면 남다른 책임이 또한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특권과 책임을 일치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특권만큼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만큼 책임도 큽니다. 먼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은 만큼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된 자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책망이 더 큽니다. 또한 특권을 가진 자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안 받은 것만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 말합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특권과 책임을 얼마나 잘 일치시켰는지 모릅니다. 또한 그는 "내가 전파한 후에 도리어 떨어질까 염려한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전한 만큼, 나의 권리만큼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만큼 우리가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세계 전민족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이 말씀을 통해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주인에게 책망을 듣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잘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은 뜻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장식용이 아닙니다. 땔감용이 아닙니다. 관상수가 아닙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열매를 내는 나무는 열매가 곧 생명입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가 없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에 열매를 못 내면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인은 열매 없는 나무를 보고 진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무화과나무는 처음 3년 동안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그래요. 지금 이 주인은 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만일에 주인이 3년이 되지 않았는데 찍어 버리라 했다면 이 주인이 잘못한 것입니다. 관상수나 아니면 다른 나무를 심어놓고 열매를 원한다면 주인의 무모함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주인은 열매가 맺히는 나무를 심고 3년이 지난 다음에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주인은 진노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은 정당한 나무에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은 주인에게 있어서 언제나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진노는 성경말씀에서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이사야서 5장 7절 포도원의 노래에서 주인은 말합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대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포악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 되었도다." 기대하던 것을 얻지 못하던 주인의 슬픔과 주인의 탄식의 노래가 이곳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아리칼의 이야기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 아들이 계속해서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게 살아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너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곧 물을 주어도 열매 맺을 수 없는 나무 같구나" 이렇게 말을 했다고 그래요. 그랬더니 아들이 "나를 다른 곳에 옮겨 심어 주소서" 말했다고 그래요. 그때에 아버지가 "물을 주어도 못 맺건만 어찌 옮겨 심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랴"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기 자리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귤 농사짓는 사람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잘 맺히던 귤을 다른 땅에 심어놓으면 한 해가 지나야 열매가 열린다고 그래요. 뿌리를 뽑아 다른 곳에 심어놓으면 잘될 것 같지만 잘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잘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가 심기워져 있는 땅이 잘못됐다고 한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주인은 아무리 물을 주고 거름을 줘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 주인의 엄한 문책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엄하신 문책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열매 맺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또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는 3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 그 나무는 열매 맺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가능성이 없는 나무는 아예 찍어버리는 것이 옳다는 주님의 저주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저주 말씀은 계속됩니다. "어찌 땅만 버리느냐" 말씀하지 않습니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다른 나무에도 해를 준다는 말입니다. 다른 나무의 수분을 훔쳐갑니다. 다른 나무의 영양분을 뺏어갑니다. 이런 일은 해를 주기 때문에 찍어버림이 마땅하다고 주인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가능성이란 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금년 한 해만 더 참아 주소서. 내가 땅도 파고 거름도 주겠습니다. 물을 많이 주어보겠습니다. 만일 열매를 맺으면 좋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그때 가서 찍어 버리소서." 예수님께서 사람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에 대한 가능성,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모독과 저주의 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에게 가장 모독적인 말은 "아, 저 사람 쌀만 축낸다." 이 말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말입니까. 이 성경말씀을 빗대어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백해무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쌀만 축내는 사람이라고 하면 땅만 버리는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요구하시는 선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 말씀하십니다.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이렇게 자위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고 살아간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기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만 안 줘도 괜찮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이지 하나님의 기준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나는 열매를 못 맺었지만 다른 포도나무에게는 그렇게 해는 주지 않고 살아가지 않느냐. 그런데 왜 찍어버리느냐.' 그렇게 불평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죄입니다.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있는데 우리가 생으로부터 무엇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생에 대해 무엇을 제공했느냐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맡고만 살아가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제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서 선을 행한 것이라고 자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왜 이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렸는가 하면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포도나무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열매를 맺지 못한 그 자체는 잘못된 것같이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나무에게 해를 주는 그 자체를 악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 마을에 가보면 "반쯤 침몰한 배는 완전히 침몰한 배보다 못하다"란 말이 있습니다. 배가 쑥 가라앉아 버리면 보기도 흉하지 않고 다른 배가 지나가는 데 방해가 안되는데 반쯤 침몰하다가 남은 것은 다른 배가 지나갈 대 방해가 될뿐더러 보기도 흉하다는 말이에요. 차라리 완전히 뿌리를 뽑아서 없어지면 흉하지도 않고 다른 나무에 해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주님의 이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 무화과나무는 있어야 할 열매가 없기에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찍힐 위험성입니다. 없어질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3년 이상 가지 않습니다. 종국적인 심판의 날이 왔습니다. 여러분, 모든 죄인들에게는 은혜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은혜의 시간에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인내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하고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그 기다리심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히브리서 2장 2-3절 말씀에 히브리서 기자가 말합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라." 회개를 위한 할당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르고 또한 이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말씀을 통해서 이 과수원지기의 옹호를 볼 수 있습니다.
과수원지기는 간청합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파고 거름도 주리니 만일 이후에 실과를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찍어버리소서." 이스라엘을 위한 그리스도의 간전한 간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옹호자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보혜사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에 보면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인데 도와주는 사람, 변호해 주는 변호사, 대신 일해 주는 사람 등의 뜻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도움자가 되십니다. 나를 위해 대신 말해 주는 분입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나를 대신해서 변호해 주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보혜사가 내 대신 올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간구해 주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내가 잘못했을 때 끝까지 나를 옹호해 주시고 변호해 주시는 그러한 분이시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가지고 계십니다. 가능성을 보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믿고 계십니다. 한 해만 더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게 되면 열매를 맺힐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없고 또한 주인이 와서 찍어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나무이지만 한 해를 더 기다려 달라고 간절하게 간구하시는 주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중보자이신 주님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소돔 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잘 압니다. 끝까지 기다리고 마지막까지 소돔 성을 위해서 간절하게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기도,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간절한 중보자의 간구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에 대해서 조급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계십니다. 마지막까지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인내요 사랑이요, 주님의 우리에 대한 중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베드로가 주님께 다시금 인정받은 장면을 잘 압니다. 그런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을 때에 그 눈이 어떠했을까요? `이 괘씸한 사람'하고 노려보는 그런 눈이었을까요? 베드로에게 정말 회개를 촉구하는 사랑의 눈길, 자비로움의 눈길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자비로운 눈길을 통해 베드로는 다시 한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부활하신 그 장면을 목격하고도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말하고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셨습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다시금 인정해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까? 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확인하십니까?
베드로가 이미 갈릴리 바다로 간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그를 건지십니다. 그로 하여금 대사도가 되게끔 다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내와 예수님의 자비로우심 속에서 우린 계속해서 다시금 한 해 동안 더 보장받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 말씀과 더불어 바울의 민족에 대한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는 이스라엘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로마서 10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과 친척을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라" 말합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그들이 다시금 돌아올 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원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중보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만일에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면 우리가 회개를 촉구하는 이 말씀을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이제 정리해 보십시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같은 택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은혜를 받고 살아갑니다. 우린 오랜 역사 속에서 아름다운 교리를 형성해 나가며 참으로 신령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선택하시고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귀한 은혜를 주셨는데 이 특권이 우리의 책임과 일치하지 못하면 우린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사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관용과 기다림의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 기다려만 주시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때가 올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금년도 "한 해만 더 참아주소서"라는 중보의 기도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물론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볼 때에 얼마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땅만 버리게 되는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의 주님께 죄송한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금 이렇게 간구하십니다. "금년도 참아 주소서, 내가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다시금 가꾸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또한 내년을 기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엄격한 심판의 때는 반드시 다가옵니다. 만일에 그때가 왔다면 더 이상 회개할 수 없고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해만 더 참아주소서'하는 주님의 간절하신 간구함 속에서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다시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서 많은 열매 맺는 우리 성도들,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레미야 45장 강해설교말씀] 바룩에게 하신 말씀(렘 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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