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발랏과 도비야의 성벽 재건 방해(느 4:1-6)
느헤미야 4장에서 산발랏과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고 있다.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자들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비웃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항상 방해꾼은 있다.
1절 바예히 카아세르 샤마 사니발라트 키 아나흐누 보님 에트 하호마 바이하르 로 바이키아스 하리베 바얄리에그 알 하예후딤
성 경: [느4:1]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신발랏과 도비야의 조롱]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 '산발랏'이 성벽 재건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일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사전에 이미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산발랏'만이 유대 백성을 훼방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까닭은, 그가 유대 백성을 훼방하는 일에 선동자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견해는 여러 명의 훼방자가 동시에 언급될 때도, 그 이름이 항상 그들 중 첫 번째에 위치한다는 사실로써도 분명해진다(7절 ; 2:10, 19 ; 6:1, 2, 5). 한편, '산발랏'이라는 이름은 '달신(月神)이 그에게 생명을 주었다'라는 말인 바벨론어에서 유래되었다. 2:10에 '호론 사람'이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그는 에브라임 지파 남쪽 지역인 '벧호론'(Beth-horon)에서 출생한 듯하다. 그리고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성전은 이 산발랏에 의해 건립되었고 산발랏은 자기 사위를 이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하나 그 사실성 여부는 분명치 않다. 한편, '크게 분노하며', '비웃는' 산발랏의 반응은, 2:19에서 보다 한층 강렬한 것이며 6:2에 가서는 느헤미야를 살해하려고까지 하는 것으로 발전된다.
2절 바요메르 리피네 에하이브 비헬 쇼미론 바요메르 마 하예후딤 하아멜랄림 오심 하야아지부 라헴 하이지바후 하이칼루 바욤 하이하유 에트 하아바님 메아레모트 헤아파르 비헴마 시루포트
성 경: [느4:2]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
자기 형제들 - 이들은 의논 대상이 될만한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도비야'도 포함될 것이다(3절).
사마리아 군대 - 페르시아 정부가 파견한 수비대라기보다는 해당 지역별로 조직된 부대인 듯하다(스4 : 23). 산발랏은 이 '군대'를 이용해서 유대 백성을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서라도 괴롭힐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8절). 사실 페르시아 정부의 지배력이 제국 내의 곳곳에 직접적으로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산발랏의 이 같은 사악한 생각은 실천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Rawlinson).
미약한 유다 사람들 - '미약한'(아말렐림)은 '쇠퇴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나무가 시들어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사 16:8 ; 24:17). 특히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주로 소망이 없는 암울한 상태를 가리킨다(사 19:8 ; 호 4:3).
제사를 드리려는가 - 이 문구에 대해서는, (1) 이'제사'를 성벽 재건사업이 마쳐질 때에 드려지는 감사의 제사로 보고 유대 백성이 성벽 재건을 완료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2)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초자연적인 힘으로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가'라는 식의 빈정댐으로 볼 수도 있다(Williamson).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 이것도, 유다 백성들을 무능한 자들이라고 하는 조롱이다.
소화된 돌을...다시 일으키려는가 -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사용할 석재(石材)를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롱이다(Rawlinson, Fensham).
3절 비토비야 하암모니 에칠로 바요메르 감 아세르 헴 보님 임 야알레 슈알 우파라츠 호마트 아비네헴
성 경: [느4:3]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 '도비야'가 산발랏의 측근 혹은 직속 참모였음을 보여준다.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 '여우'로 번역된 히브리어 '슈알' 구약에서 7회 나오며(삿 15:4 ; 시 63:10 ; 아 2:15 ; 애5:18 ; 겔 13:4) '쟈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쟈칼이 주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반면 여우는 대개 혼자 다닌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문에서는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여우'로 보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한 마리의 여우가 밟아도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성벽은 훌륭한 공성(攻城) 무기로 오랫동안 공격한 후에야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과장된 조롱임이 분명하다.
4절 쉬마 엘로헤누 키 히아누 우자 비하세브 헤리파탐 엘 로샴 우티넴 리비자 비에레츠 쉬비야
5절 비알 티카스 알 아오남 비하타탐 밀파네카 알 티마헤 키 히키이수 리네게드 하보님
성 경: [느4:4, 5]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느헤미야의 기도]
본절과 같은 탄원적 기도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분의 뜻대로,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사업이 원수들에 의해서 멸시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드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시의(時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5:19 ; 9, 14 ; 13:14, 22, 29, 31 ;시 69:22-28 ; 79:12 ; 109:6-20).
우리가 업신여김을...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 '업신여김을'(부자)은'조롱하다' 혹은 '모욕하다'의 의미이며 '노략거리'(비자)는 '전리품'을 뜻한다. 여기서 본 저자 느헤미야는 이처럼 발음이 매우 유사한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말의 유희(Word play)를 살리고 있다. 즉, 느헤미야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부자'라는 행동, 즉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비자'라는 불행, 즉 그 결과에 도달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Fensham).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 이것은 고대 중근동 민족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환난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민족이다(스4:9, 10).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 여기의 '덮어두지'(카사)는 죄의 용서를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렘 18:23 에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느헤미야가 예레미야서를 인용한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은 예레미야 시대나 느헤미야 시대에 공히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Fensham).
6절 바니비네 에트 하호마 바티카세르 콜 하호마 아드 헤치야흐 바예히 레브 라암 라아쇼트
성 경: [느4:6]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느헤미야의 기도]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聯絡)되고 - 이것은 예루살렘의 성벽에 의해서 완전히 둘러싸여졌음을 뜻한다.
고가 절반에 - 원문상으로는 단지 '절반까지' 혹은 '중간까지'라는 뜻만 있으므로, 이 말은 성벽의 길이나 넓이에도 적용될 수 있으나 높이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다. 즉, 성벽이 원래 계획했던 것의 반 정도의 높이로 쌓였었음을 가리킨다(Rawlinson, Fensham).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 문자적으로는 '역사할 마음이 있었다'의 뜻으로서, 참여자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마음 자세가 성벽 재건 사업이 크게 진척될 수 있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이사야 35장 복음 설교말씀] 완성된 메시아 왕국(사 3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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