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마태복음 비유] 겨자씨 비유(마 13:31-32)

두란노 서원 2020. 12. 1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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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비유 하나님 말씀 중에서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겨자씨가 작지만 나중에 크게 자라서 많은 새가 몰려오게 됩니다. 복음은 처음에는 작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성도의 삶도 환난과 핍박이 있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크게 번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마 13:31-32)

 

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장에 수록되어 있는 여덟 개의 비유 가운데 처음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모두 농부가 씨 뿌리는 광경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흥미 있는 사실은 세 비유가 모두 씨 뿌린다는 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말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는 점입니다.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는 씨가 아주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예수께서 전파하시는 천국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라는 두 종류의 씨가 나옵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을 가리키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비유였습니다. 이 비유는 둘 다 자랄 때까지 두라는 말씀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판이 연기되고 있습니다.

천국은 도래했지만 가라지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백성들은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가라지 인지는 모릅니다. 누가 가라지인가를 구분하기 위한 노력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옵니다. 그때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유일한 구분 점은 열매에 있었습니다. 열매가 맺히면 알곡과 가라지는 여지없이 구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 백성의 열매 맺는 삶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도 주님은 우리 삶의 열매를 보시기 원하시고 게실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서는 {}가 직접 천국을 의미합니다. 다른 비유와는 달리 여기서는 비유의 중심이 농부나 그가 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려면 밭에 뿌려진 '겨자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한 농부가 밭에 갖다 뿌린 한 알의 겨자씨가 어떻게 변화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예수께서 알리려고 애쓰셨던 그 천국의 한 다른 윤곽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 개의 씨 뿌리는 비유는 천국의 시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비유가 한결같이 말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비밀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돌아다니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시고 회개를 촉구하실 때만 해도 천국이 이미 온 것인지, 아니면 문 앞까지 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이 땅에 오지는 아니하였는지 확실치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께서 전파하셨던 바로 그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중요한 도입부라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은 이미 여기저기 떨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를 만나고 그에게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 여부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거나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실천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이미 뿌려진 천국의 말씀 때문에 환난과 핍박과 멸시와 유혹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천국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좋은 씨를 밭에 뿌리는 자, 곧 인자에 비유된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천국의 자녀들을 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간 이 세상에서 천국의 아들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과 함께 몸부림치며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이 혼란한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는 설명은 천국이 정말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서 한번 더 이 시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씨를 뿌렸다"거나 "씨가 떨어졌다"는 표현은 역사 속에 시작된 천국의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나타났고 그 천국이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와 천국의 관계는 보다 더 긴밀합니다. 예수나 그의 사역을 천국이 나타나고 전개되고 발전해 가는 도구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긴밀성을 파괴하는 생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사역 자체가 바로 천국의 전개, 발전과정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천국의 도구나 동인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을 상상할 때, 예수 없이도 그런 천국이 어딘가 있을 것처럼 동경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예수의 오심, 사람들을 부르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 등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신약시대의 천국은 예수와 관계된 다시 말해 기독론적인 무엇이라는 말씀입니다.

 

1. 겨자씨 비유(31-32)

예수께서 천국은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심으로써 전하고자 하셨던 내용은 이 씨가 작은 것처럼 천국도 미세하게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그 장엄하고 웅대한 분위기를 한마디로 부정하시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먼지 한 점 정도의 자리밖에는 차지할 수 없는 겨자씨, 그 작은 것이 천국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런 천국을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천국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와 함께 강림하실 화염과 우뢰의 하나님! 모세처럼 홀연히 나타나 억눌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메시아! 이런 상황을 기대하던 그들에게는 천국이란 감히 인간의 머리에는 담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단어였습니다. 천국에는 위엄이 어려있었고 힘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전쟁과 평화, 억압과 자유, 심판과 상급, 저주와 축복,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등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을 천국과 결부시키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알리시려던 천국의 비밀은 정반대였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요 거의 흔적도 없는 것으로서, 보면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겨자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천국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밭에 씨를 뿌리듯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천국의 자녀들을 뿌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도 없이 혼자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가 머리 둘 곳도 없는 나그네로 오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세상과 이 온 세상의 만물을 만드신 분이 정작 이 세상에 와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천국은 갈릴리 한 구석에서 초라하게 시작된 행렬이었습니다. 나팔소리도 없이 오신 예수, 홍길동같이 구름을 타고 신나게 다니지 않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걸으시는 예수. 따라다니는 제자들에게 영광은커녕 진수성찬 한번 차려주지 못하는 초라한 예수. 이것이 밭에 뿌려진 겨자씨처럼 시작된 천국입니다. 위대한 천국의 역사적 발걸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나사렛 예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시작하신 일이 어떤 일인가를, 비유라는 그릇에 담아서 그의 제자들에게 만이라도 알려주시려 했습니다. 천국의 이러한 시작은 그를 믿는 사람에게만 겨우 감지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겨자씨 비유도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천국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기대한 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천국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거부하는 원인을 명확히 진단하시고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천국이 아무리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 시작은 참된 것임을 변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미세한 출발은 예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출발점이었습니다. 다른 천국은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이 의도가 자기변명과 격려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릅니다. 천국은 그렇게 초라하고 미미한 것으로 탄생했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던 그 천국이었습니다. 이 하잘 것 없는 천국의 첫 울음소리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허황된 그리고 화려한 천국 관을 송두리째 무산시키고 맙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교정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여신 그 천국으로 따라오라고 제자들을 향해 손짓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교육하시려는 의도는 이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는 말씀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씀에서는 어떤 씨보다 '작은' 씨와 '큰 나무'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미래의 '' 모습이 현재의 '작은' 존재를 잊게 합니다. 천국이 거의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에 들어왔다는 현실이 실망스럽지만 거대하게 성장한 천국의 모습이 이를 잊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미리 천국의 미래를 말씀하신 의도 중에 하나는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시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천국은 발전한다는 개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어떤 나무보다 더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천국은 한 구석에서 조용하게 시작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규모로 크게 자라나는 변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나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천국이 겨자씨가 자라듯 발전한다는 개념을 나라의 확장이나 다른 영토를 정복하고 통합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서 시작된 천국, 즉 그를 통해 천국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그 광경을 지금 자신을 따라나선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실제로 보고 계셨습니다. 천국은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하늘나라의 비밀은 그가 계셨던 그 땅에서 하늘나라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시선은 특히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겨자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미미한 출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부정해서는 안 되는 유일한 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꿈은 아주 원대했습니다. 두 명에서 네 명으로, 네 명에서 열 두 명으로 자라다가 시대와 시대를 거쳐, 그리고 장소와 장소를 넘어 엄청난 규모의 공동체로 자라날 것을 꿈꾸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의 이 발전과정의 한 시점에 태어나 큰 나무로 자라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거대한 나무의 한 작은 가지쯤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의 외침에서 태동하고 있던 그 천국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 모든 장소로 파고들어 가 천국의 아들들을 낳고 있습니다. 천국은 단번에 세상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죽어서야 겨우 가는 저 세상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국은 예수의 사역으로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오늘도 변함없이 굴러가지만 천국은 이미 그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지 않았고 한 많은 이 세상은 유황불과 아마겟돈 전쟁으로 종말을 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는 흘러갈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한 이질적 요소가 들어와 있습니다. 천국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섭리, 이런 것이 역사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의 신적 통치는 점점 더 거대해지며 세상 전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종말이, 겨자씨의 성장이 멈추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외형적으로 보아서 현재 약 10억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천국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역사 속에 드러난 천국의 조각과 앞으로 찾아올 또 다른 천국의 조각들까지 합친다면 천국은 어마어마하게 더 불어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나무보다도 더 크게 성장한, 계속 성장하고 있는 천국 나무.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거대한 하나님 나무의 한 부분으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혼자 부름을 받아 외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들은 아닙니다. 이천 년 동안 자라온, 그리고 얼마간은 더 자라날 겨자씨라 불리는 천국의 한 부분으로 오늘 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비록 출발은 미미했지만 점점 커져서 전 세계와 전 역사를 채우고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이 발전 개념에는 후퇴나 쇠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그래프는 상승 직선을 그릴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승리하기까지 상승 직선을 그리면서 서서히 부상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더 이상 이 천국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 이 천국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교회건물이 있어서 누구나 오라고 손짓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지만, 천국 나무가 뻗어가야 할 공간과 시간이 겨자씨의 남은 성장을 재촉하지만, 예수의 비유는 그대로 적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른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겨자씨 비유도 그 당시에는 예언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가장 작은 겨자씨가 밭에 떨어지는 것으로 비유되었던 그 천국이 이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어떤 것보다도 더 큰 나무로 성장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십자가, 성경, 찬송가 그리고 이런 것들 주변에 어른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 천국의 흔적을 뚜렷이 보면서도 이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혹은 천국과 단단히 결부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여전히 비밀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을 거부하고도 이천 년 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 편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의 비유에 우리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예수와 그에게서 시작되는 천국에 극도의 거부감을 갖는 이 사람들도 그들이 비록 예수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기를 원하지만 결국은 크게 자란 천국 나무의 그늘 아래 쉬며 더위를 식히고 노래를 부르며 등지를 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점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확인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란 믿음 안에서 예수를 인정하거나 불신으로 거부하는 양자택일의 역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천국 밖에서의 영원한 죽음 사이의 선택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예수께서 선택하시기를 원하는 길에 들어가며, 믿음을 통해 천국 나무의 한 작은 부분이 된 사람들은 나무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후 세대들에게 그들도 천국을 선택하도록, 그래서 천국의 일부가 되도록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선택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는 역사의 주체들인 것입니다.

 

2. 누룩 비유(33)

누룩 비유는 겨자씨 비유와 내용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겨자씨 비유에서는 천국이 밭에 뿌려진 겨자씨에 비유된 것에 반해서 누룩 비유에서는 천국이 어떤 여자가 가루 속에 갖다 넣은 누룩(발효제)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성장과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누룩 비유는 이 천국이 외부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비유는 누룩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누룩이 주는 변화로써 천국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룩 비유를 통해서 천국은 거대하게 발전, 성장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거대한 힘을 행사하여 마침내 세상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자가 누룩을 넣은 것처럼 이천여 년 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그 천국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계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누룩 덩이가 되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밀가루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향한 기대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장차 누룩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될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을 기초로 현재의 삶에 계속되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천국에 대한 또 다른 부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특히 이 두 비유는 천국의 소망적인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천여 년 전에 갈릴리에서 겨자씨와 같이 아주 미미한 몸짓으로 시작한 천국이 거대한 나무로 성장해서 오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앞으로도 더 성장해서 온 세상을 가득 덮게 될 누룩과 같은 천국! 이것이 이 두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전파하셨습니다. 비록 비유라는 그릇에 담아서 귀 있는 자들만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하셨지만 말입니다. 주님은 천국이 시작되었고, 그 속에 공존하고 있는 알곡과 가라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의 유일한 구분 점은 열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인이 기대하는 삶이 열매 맺는 삶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무는 서서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커갑니다. 훗날에는 다른 모든 나무보다 커지게 될 것이며 온 세상에 가득한 누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시키는 일, 퍼트리는 일이 바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처음에 주님은 열두 제자에게 그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일을 성실히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수 없는 일꾼들이 이 나무를 성장시키는 일에 생명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나무는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이 천국이라는 나무를 성장시켜야 하는 일꾼들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오늘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서 나무에 거름을 주고 가꾸려는 선한 노력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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