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성경 지명 강해 설교문] 가데스 Kadesh

두란노 서원 2020. 3. 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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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경 지명 강해 설교문 중에서 성경에 나오는 가데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가데스는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명연구 : 가데스 Kadesh

 

1. 명칭

1) 가데스와 게데스란 이름은 가나안 땅에 있는 고대의 성소들이 있던 도시에서 사용하였다.

2) 맛소라 본문에서는 유대 도시 가운데 가데스를 게데스 북부 지역의 도시로 기록하고 있다.

3) 사막 지대에 물이 나오는 곳을 가데스, '거룩한 곳'이라고 명명했다.

4) 바네아란 의미는 다른 지명과 구분하기 위해 가데스에 첨가한 말로 뜻은 분명치 않다.

5) 초기 학자들은, 인접해 있는 네 개의 샘물들 중 하나에 붙여서 불렀다.

6) 옛 명칭은 엔 미스밧이다.

 

2. 위치 및 지리

1) 이스라엘 변경에 위치한 사막의 유일한 오아시스로 브엘세바 남서 약 80Km, 서쪽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약 8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2) 네겝 시내 경계에 있는 교차점으로 브엘세바에서 시작된 길이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이어졌으며, 동쪽은 아카바만으로 이어졌다.

3) 어떤 학자는 가데스(케데이스와 동형)란 명칭에서 비롯된 아인 케데이스(Ain Qedeis)를 가데스 바네아로 보고 있으나 그러기엔 물의 양이 부족하다.

4) 1년 내내 물이 흘러 넘쳐 목장지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인 엘 쿠테이랏(Ain el-Qudeirat)을 가데스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고고학적 자료 및 거주민

1) 로덴버그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광야에서 "가데스 샘 어느 곳에서도 출애굽 시대에 지어진 영구 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창세기 내용을 설명한다(시내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유목민이었고 성막조차 이동식 건물이었기 때문).

2) 주전 8세기를 전후하여 발굴된 유적물 가운데 성의 윤곽은 주전 6세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에돔인들에 의해 파괴된 이 성채는 전형적인 요새였다.

3) 이 지역은 여호사밧이 홍해 무역을 시작하면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4) 페르시아 시대의 사기그릇 조각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샘 주위에 사람들이 거주한 사실을 알려준다.

5) 이후 나바테야인이 거주하였고, 이 지역 전체를 마지막으로 지배한 사람들은 동로마 제국의 사람들이었다.

 

4. 복음에 나타난 가데스

1) 옛날 이름인 엔 미스밧과 함께 언급되었다(창14:7).

2) 출애굽 당시 모세는 가데스가 에돔 왕에게 속한 변방임을 말하고 있다(민20:16).

3) 아브라함은 여행에 필요한 물자 공급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창20:1).

4)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곳이다(창16:7-14).

5) 여호수아가 가데스 바네아를 점령하였다(수10:41).

 

원어설교 : 가데스 Kadesh

 

가데스 קדש : 카데쉬 Καδης : 카데스 Kadesh

창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가데스는 '거룩한 곳'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데스가 '거룩하다, 신성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קדש(카다쉬)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다쉬의 본래적 의미는 대개 평범한 것이나 속된 것과는 구별되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따로 사람과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과 레위인 제사장 그리고 성소의 기구들은 기름을 부어서 거룩한 것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1. 가데스는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가데스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의 사막에서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가뭄으로 인하여 물이 말라 있었습니다. 오랜 광야 여행으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실을 보고 '거룩한 곳' 가데스에서 모세를 원망한 사건과 모세의 실수가 민20장12-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마른 '거룩한 곳' 가데스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물을 주심으로 당신은 그 어느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심을 보이려고 하셨습니다(민20:12-13).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신들이 기적을 베풀어 물을 내는 것처럼 반석을 두 번이나 힘껏 내리쳤습니다(20:11).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가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곳' 가데스, 그러나 물이 말라 버린 그곳에 물을 풍성케 하심으로 모세와 아론이 증거 하지 못한 당신의 거룩함을 친히 증거 하셨습니다..

 

2. 가데스는 '거룩한'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를 자기의 구주라 부르는 사람들의 거룩함이시며, 그분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6:11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교회(εκκλεσια에클레시아)라 칭하고 있습니다. 곧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서 그의 개인적인 부르심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무리를 가리키고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롬8:29롬1:16고전1:2).  그리고 교회라는 말은 εκκλεσια(에클레시아)외에도 συναγω(쉬나고)라는 동사적 표현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모으다'라는 뜻이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막2:23막4:1막5:21막6:30).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를 용서받은 자들이 거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한 곳'은 인간 마음대로 세우거나 폐할 수 없으며, 사탄도 이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3. 교회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거룩한 교회로 부르시고 당신이 거룩하신 것같이 그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거룩한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행실에'라는 말은 모든 삶의 행동에 있어서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변하게 될 때에 세상이 변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나 한 사람이라도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1 : 가데스 Kadesh

 

엔 미스밧의 시련

창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임시정부 자리가 있던 중국 상해를 독립 유공자의 후손이 방문하여 그 일대를 돌아본다는 것은 감격적이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독립운동과는 좀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 가데스 바네아란 지명은 가나안이라는 만리타향에서 다양한 신앙 경험을 했던, 결코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지역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하면 브엘세바라든지 벧엘이라든지 모리아 산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 실제 잊지 못할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지역은 바로 가데스 바네아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데스 바네아의 옛 지명이 바로 '엔 미스밧'입니다.

 

1. 그곳은 방황과 갈등의 장소였습니다

1) 오아시스가 있는 곳임

가데스 바네아란 브엘세바로부터 남서방 약 80Km 지점에 위치한 광야의 오아시스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네 개의 우물이 있는 근방 사막 지대에서는 가장 큰 오아시스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그의 역사에 따라 고향 친척 집을 떠나 겨우 가나안 지역에 들어온 아브라함이었지만(창12:5) 잦은 기근으로 인해(창12:10)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물이 풍부한 남방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던 가데스 바네아는 그에게 삶의 도피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오래 머물렀으며, 애굽을 오가는 여행길에 충분한 물과 식량을 공급받기도 했습니다.

 

2) 여러 갈래 길이 있는 곳임

브엘세바에서 이어져 내려온 길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 갈래로 나뉩니다. 서쪽 길은 지중해로 이어지고 동남 방향의 길은 아카바만으로 이어지며 남쪽 길은 애굽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지켜본 아브라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심히 번민하고 방황했습니다. 세 갈래 길에서 그는 물론 애굽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번민했을 것입니다. "가데스와 술 사이에 우거하며"라는 표현은 그가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가데스 인근 지역에 체류하며 고민했음을 반증합니다. 따라서 가데스 바네아란 단순한 방황과 갈등의 기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기 위해 인내하고 고민한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성급히 자신의 판단을 내리지 않고 힘에 겹고 고민스러울지라도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기쁜 응답을 내리심을 알 수 있습니다.

 

2. 시련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곳입니다

1) 아브라함의 가정에 시련이 닥쳤음

고민과 갈등 속에서 우거 하던 가데스 바네아는 아브라함에게 또 하나의 시련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생명 보전을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고 그랄 왕에게 내어주어야 했던 상황입니다.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아름다운 자태가 남아 있는, 아직 아이를 한 번도 낳아보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를 권력자의 성적 노리개로 내놓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하나님 되심을 체험하게 됐음

아내를 빼앗겼던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 사라를 무사히 돌려받습니다. 하나님은 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창12:7). 일생을 사노라면 가데스 바네아의 아브라함과 같이 갈등과 번민에 더하여 수치와 고통이 일시에 엄습해 오는 경우를 경험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빼내어 천국으로 옮겨놓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고통일지라도 묵묵히 감내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일에 준비되어 있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친히 우리 문제에 개입하셔서 흐름을 반전시켜 주십니다.

 

3. 그곳은 돌이킴이 있는 곳입니다

1) 하갈과 이스마엘도 은혜를 얻은 곳임

사실 가데스 바네아는 아브라함에게만 유서 깊은 지역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권속이요, 사라의 몸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했던 하갈이 사라에게서 쫓기듯 도망 나갔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 바로 가데스 바네아의 인근 지역입니다(창18:7-14). 광야에서 방황하는 하갈을 만나 주신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그에게 위로를 주시고 그가 낳은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사람들은 그 지역을 브엘라헤로이, 즉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라면 그가 비록 범죄하고 실수했을지라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데스 바데아는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2) 하갈이 돌이켰던 장소임

하갈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16:9)고 권고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만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바른 행실인지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장래에 대한 밝은 예언과 축복만이 아닙니다. 실행하기 난감할지라도 그것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결국엔 화가 됨을 알려 주고 깨우쳐 주는 것 또한 지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장래, 그리고 자손까지도 축복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릇 행하고 있는 잘못된 행동양식을 바로잡기를 원하십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지금 우리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아브라함에게 잊을 수 없는 삶의 터전이요, 시련과 하나님의 은혜가 교차했던 곳이며 아울러 그의 권속 하갈이 방황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그릇된 인생행로를 돌이킨 곳입니다.

우리의 가데스 바네아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지금 여러분이 처한 이 자리에서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번민과 방황과 시련의 장소는 곧 하나님의 기적과 위로를 체험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기억하시는 성도가 됩시다.

 

설교2 : 가데스 Kadesh

 

가데스 므리바의 교훈

민27: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므리바란 '다툼'을 의미하는 말로 가데스 바네아의 별명입니다. 성경에는 왜 가데스가 이런 별칭을 얻게 되었는지에 관한 사건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민20:1-13).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의 한 사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은 평범하지만 깊은 영적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일도 막상 우리에게 닥치면 우리 역시 그와 유사한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격차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 차이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칠 유사한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1. 백성들은 불평불만으로 일관했습니다

1) 기적을 체험하고도 원망했음

가데스 바네아가 므리바란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 발단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고 불평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마실 물을 얻지 못하자 차라리 애굽에서 종노릇 하거나 다른 형제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을 때 함께 죽은 것만 못하다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미 그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로 나올 때에는 이런 시련이 충분히 예견되어 있었다는 점이며, 또한 그들은 가진 것 하나 없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곳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데스까지 오는 동안 최소 10회 이상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민14:22).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고 르비딤에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셨습니다(출17:1-7). 그런 경험이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뢸 믿음이 생길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원망과 불평, 다툼으로 일관하였습니다.

 

2) 불신앙의 본성 때문에 원망하게 됨

원망의 본질적 요인은 인간 심성 깊숙이 내재해 있는 뿌리 깊은 불신앙의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잠시뿐입니다. 새로운 시련이 닥치면 은혜로운 하나님이 또 도와주시겠지 하는 굳센 믿음보다는 왜 또 이런 시련이 닥치는가 하는 불안과 염려에 압도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혀 그만 짜증내고 불평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리하여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라고 권면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시종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1) 변함없으신 사랑으로 대하심

오직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는 우리의 생각이나 상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회중을 모으고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보복이나 책망도 없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의 언급이 있을 만한데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눅15:20-24).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의 탕자를 받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를 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은혜로 자기 백성을 대해주심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고 원망으로 일관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자격이 없지만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은혜로 일관되게 대우하십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모세는 인간적인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1) 끝까지 인내하지 못했음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할 때만 해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했던 모세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을 얻고 돌아왔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격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거세게 질책하며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씩이나 두드리며 물을 내었습니다. 본문은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크게 훼손한 망령된 행동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 산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해야 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간혹 지극히 인간적인 자기감정의 분노를 폭발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대신한 거룩한 분노인 양 위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감정에 자기가 속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모세는 큰 불이익을 당했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신한 감정 폭발을 위임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임한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관용이고 용서이며 자비이며 긍휼입니다. 우리는 종종 관용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할 때 오히려 정죄와 비방과 분노의 감정을 폭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가나안 입경을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받았듯이 우리 자신에 대한 심판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야 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적인 분노,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 종국엔 사탄적이요, 마귀적이요, 정욕적인 것임을 명심하고 철저히 억제해야 합니다. 결국 가데스 바네아는 므리바라는 슬픈 또 하나의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이름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으로 인해 르비딤이 얻었던 별칭이기도 합니다(출17:7). 그런데도 다시금 이 이름이 가데스에 붙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뿌리 깊은 인간의 불신앙의 깊이를 알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을 향해 보복하지 않으시고 변함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요구대로 생수의 강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을 모르고 혈기로 대한 모세는 그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자비의 깊이를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도는 그분의 은혜를 더욱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의 더 깊은 곳에 들어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3 : 가데스 Kadesh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꾼들

민13:25,26 신1:19-25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시내산을 출발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열 하룻만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선발하여 정탐꾼 열 두 명을 가나안에 보내셨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세세한 일에도 직접 관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도록 명령하셨을까요?

 

1. 가나안을 맛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1)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심

하나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신 첫째 이유는 가나안을 보여 주심으로써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란 말로만 듣던 땅이었지 실제로 본 일이 없는 환상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환상이나 동화에나 있는 나라가 아닌 실존하는 나라요 그들에게 조상 때부터 약속된 땅임을 일깨우고자 미리 그들로 가보게 하신 것입니다. 툭하면 돌아가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며, 종살이하던 애굽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나라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들어가 차지하도록 미리 맛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성도들을 살펴보십시오. 하나같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골3:1).

 

2) 방황을 끝내게 하심

하나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심은 하나님의 계획이 광야에서의 여정을 매듭짓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영광과 영화가 있음을 알게 되면 현재의 방황을 끝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롬8:18). 왜 우리는 예배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십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은혜받지 않는 한 그의 마음에 갈등과 번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2. 백성들을 시험코자 하신 것입니다

1)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보여주심과 아울러 과연 그곳을 차지할 만한 백성인가를 시험코자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자세는 여호수아나 갈렙과 같은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직접 가서 보고, 또 그 증거로 그 땅의 포도송이를 따왔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언약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위구심에 주춤거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심하는 자는 뭔가 특별한 기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 신비한 일을 체험하거나 보기를 원하기 전에, 평범한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능력을 발견할 영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2) 경한 것을 중요하게 봤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전혀 무가치하게 본 아낙 자손을 크게 보았습니다. 그들을 대장부라 하고 자신들을 메뚜기로 비하하였습니다. 단지 그들의 겉모습이 보여주는 거대함이 두려워 자신들을 초라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잊어버리고 오직 눈에 보이는 힘만을 크게 생각하여 여호수아나 갈렙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웃이나 환경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확히 바라보고 평가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환경을 정확히 바라보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 또한 정확히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이라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3. 옥석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1) 불신앙의 사람들이 나타났음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보여 주신 은혜는 결국 불 신앙인 들을 갈라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만 가는 것임을 일깨웁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히6:4,5)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약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2) 여호수아와 갈렙이 부각됨

반대로 하나님의 언약에 굳은 신뢰를 지녔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영광을 맛본 후 더욱 믿음이 굳어짐으로써 가나안 입성에 대한 확약을 얻었고 끝내는 출애굽 1세대 가운데 그들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갈렙의 경우 그가 귀화한 이방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이나 조건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주어짐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이러한 믿음이 있는가 다시 한번 점검하고 스스로 확증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 항상 선한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의 영안이 열려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이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그것을 찾으십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을 찾으셨습니다. 여러분의 가데스 바네아는 어디입니까? 혹시 지금 이 자리는 아닙니까? 지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결단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합시다.

 

설교4 : 가데스 Kadesh

언약대로 정복한 땅들

수10:40-43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개혁자 루터는 "성도들의 삶은 불안하기는 하지만 보장되어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단 권세와 늘 싸워야 하는 성도의 삶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셨고 또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여호수아와 선민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 남부 가나안 땅들을 정복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승리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제 선민들이 정복한 남부 가나안 땅들을 살펴봄으로써 성도들이 신앙의 선한 싸움을 통해 얻을 삶의 축복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 정복했습니다

1) 죄로 인해 심판받았던 곳임

가데스 바네아는 선민들에게 있어 결코 잊지 못할 장소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출애굽 일 세대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40년간 광야에서 징계를 받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곳을 '심판의 우물'이란 뜻으로 '엔 미스밧'(창14:7), 또는 하나님과 다퉜다는 뜻에서 '다툼의 우물'로 부르기도 합니다(민20:3-15).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정탐꾼들을 보냈었으며 그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 백성들이 하나님께 크게 원망하고 불신의 죄를 행한 고로 40년간 광야 유랑민 신세가 되었으며 대부분 광야에서 멸절되었던 것입니다. 이 가데스 바네아를 드디어 선민 2세대들이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정복한 것입니다. 남부 가나안 정복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시작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천국의 첫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죄로 심판받은 장소인 가데스부터 정복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모든 것을 얻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2) 연단을 위해 남겨둔 견고한 세력도 있음

그다음 성경은 '가사'까지 정복했다고 했습니다. 가사 역시 역사가 오래된 성읍이며 가나안 땅의 대표적인 족속인 블레셋 사람의 중심 성읍입니다. 그런데 이 가사를 분배받은 유다 지파가 온전하게 블레셋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연유로 그 족속의 잔존 세력이 그곳에서 남게 되었고(22) 그 결과 블레셋 인들은 오랫동안 틈만 나면 선민들을 괴롭히게 된 것입니다. 사사 삼손도 가사 신전에서 순교했음을 성경은 증거 합니다(삿 16:1-3,21).(삿16:1-3,21). 가사는 '견고한 성'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가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기 위해 남겨둔 가나안 성읍 중 하나였습니다(삿2:21-23). 아직도 이 세상에는 사단의 견고한 진지가 남아 있습니다(고후10:4). 그러나 사단의 견고한 세력도 가사 성처럼 성도들에게 온전히 정복될 날이 올 것이며, 그때까지 그 세력은 성도의 신앙 훈련과 연단의 수단 역할을 할 것입니다.

 

2. 고센과 기브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고생했던 애굽 땅과 동명의 땅임

그다음 성경은 '고센'도 정복했다고 부연합니다. 고센은 선민들이 애굽 땅에서 종노릇 할 때 거했던 수용소였습니다(창45:10출8:22). 그러나 이곳 고센은 가나안 남부 네게브 지역의 비옥한 지방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출애굽한 선민들이 옛날을 생각하여 붙인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고센이란 '바짝 마르다'는 뜻입니다. 물질도, 희망도, 활기도 바짝 말라버린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된 세상을 애굽의 과신이 상징해 줍니다. 이와 같은 고센 땅에서 하나님은 선민들을 구출해 주셨고, 또 같은 이름을 지닌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는 죄악 세상에서 진리도, 언약도, 희망도, 사랑도 없이 방황하던 우리를 불러내 주셨으며, 그 후에는 주님의 진리와 의와 사랑으로 다시 정복하게 해 주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교훈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도피만 하는 것은 진정한 정복이 아닙니다. 의의 병기를 들고 세상을 주님의 나라로 건설해 나가는 성도가 참된 정복자가 되는 것입니다.

 

2) 희망의 언덕도 있음

그다음 성경은 '기브온에 이르기까지'(41) 정복했다고 했습니다. 기브온 역시 남부 가나안의 산지이며 그 뜻은 '언덕위의 새싹'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영적 선물을 볼 때 그 가치가 싹처럼 미미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 그리고 의로 여겨주시는 축복들은 물질 세상에서 볼 때 별 의미가 없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를 기반으로 주어진 것들이기에 그 가치가 무한하도록 증진되어 갈 것입니다.

 

3. 이 모든 정복은 하나님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1) 하나님께서 싸워 주셨음

성경은 이 가나안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서 싸워주신 고로 얻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42). 이스라엘 군대의 최고 사령관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직접적인 싸움은 사람들이 했으나 하나님은 전투의 중요한 고비마다 지혜를 주시고 이사와 기적을 베푸사 승리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단번에'(42)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전쟁은 인류 역사상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가장 빨리 정복한 전쟁입니다. 성도들의 승리도 그리스도께서 앞서서 싸워 승리하셨기에 손쉽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 죽음과의 싸움, 세상의 모순과 고통과 슬픔과의 싸움을 모두 주 예수께서 이미 앞장서서 싸워 이겨 놓으신 내용들이요, 그 뒤를 좇는 성도들은 신앙 승리의 요소들을 손쉽게 단번에 얻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맹세대로 이루어진 것임

하나님은 가나안 땅 입성 전에 여호수아에게 "담대히 하라...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1:6)고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이 언약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단 시일 내에 얻었음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언약하신 것을 틀림없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과 이름으로 맹세하신 하나님의 영생 언약을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승리로운 삶은 하나님의 맹세 안에서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투던 곳, 사단의 권세가 남은 곳, 고생의 떡을 먹던 곳,, 이 모든 곳을 약속대로 정복했습니다. 이는 고난이 넘치는 이 세상을 성도들이 기필코 정복하고 주 안에서 영광을 누릴 것을 예표 해 줍니다.

 

설교5 : 가데스 Kadesh

정화와 새 출발의 장소

민16:47-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아무리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상적으로 횡행하는 세상이라도 변할 수 없는 기독교의 근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그 은혜란 하나님이 죄 많고 허물 많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구원의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물 많은 우리를 그 모습 그대로 구원하셨다 할지라도 우리의 모습이 이전 모습 그대로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역시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정화하고 새롭게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명확히 나타난 사건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입니다.

 

1. 반역과 징벌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1) 고라 무리의 반역이 발생함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온에 의해 하나님의 종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으로 나타났습니다(민16:1-40). 하나님께서 같은 레위의 후손인데 유독 모세와 아론에게만 말씀하실 리 없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주장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불신앙이 언제나 하나님의 종에 대한 불순종과 거역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역시 주로 선지자에 대한 대적 행위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성도가 자신의 믿음 유무를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를 공경하는가 아니면 거역하고 불순종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불평할 때 모세를 원망하셨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행동을 당신을 향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삼상8:7).

 

2) 큰 징벌이 시행됨

하나님께서는 친히 고라의 일당을 땅의 입을 열어 삼키심으로써 엄히 징벌하셨습니다. 죄에는 심각하고 급속한 전염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사람 자체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 죄로 인해 그 사람 영혼까지 형벌을 받을 것을 염려하셔서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라 일당을 엄히 벌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보여 줍니다. 죄가 민족 전체를 삼킬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하고 무관심한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환난이 성도의 믿음을 정화하고 그에게 구원의 소망을 이루게 해 준다면(롬5:3,4) 환난은 오히려 은혜요, 축복이며, 기쁨의 대상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확립시키신 곳입니다

1) 모세의 중보로 인해 염병이 정지됨

고라 일당의 반역은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쳐 수많은 사람들이 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불을 들고 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속죄할 것을 명했고 그 결과 온 이스라엘에 번져 있던 염병이 즉시 그쳤습니다. 성도가 때로 하나님의 종을 원망하고 거역했을 때도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 또한 하나님의 종에 의해서만 제공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주의 종을 흉보고 멀리하는 자가 아니라 흉과 허물을 감싸주고 항상 가까이하며 그의 사역을 돕는 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권위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로 나타남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는 열 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고 레위 지파의 대표로는 아론을 지명하셨습니다. 법궤 앞에 둔 지팡이 가운데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을 틔우심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확실히 세워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론의 속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염병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친히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을 틔우심으로써 그 권위를 확립해 주신 사건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목회자를 억지로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진정 존경하고 복종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3. 새로운 전진이 시작된 곳입니다

1) 가나안을 향하여 다시 출발함

여호와의 종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확립해 주신 하나님은 그제야 모세를 통해 가나안을 향한 전진을 명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열하루 만에 가데스에 도착한 후로 실로 오랜만의 전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신앙적으로 정화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묶어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가 있는 가나안의 쟁취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나안에 합당한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서 가나안이 취소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이 이루기까지 그것은 지연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가나안을 향한 뚜렷한 전진의 목적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그의 연단이 그치질 않는 것입니다.

 

2) 옛사람은 죽어가기 시작했음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의 권역을 벗어나기에 앞서 하나님은 호르산에서 아론의 생명을 거두시고 그의 옷을 아들 엘르아 살에게 갈아입히셨습니다. 아론의 죽음은 온 이스라엘의 아까운 손실이요 슬픔이지만 그를 가나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가나안 입성의 소망을 더욱 확고히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라면 모세와 아론을 포함해 출애굽 일세대가 죽어야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죄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훨씬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며(롬13:11,12),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어가심에 대한 확실한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을 깨어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서 오랜 기간 머무는 동안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신앙적인 정화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을 향해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에게도 때로는 퇴보나 정체가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오히려 전진의 발판으로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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