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예레미야애가 3장 주석성경말씀] 예레미야의 고난(애 3:1-20)

두란노 서원 2022. 12. 1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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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장에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탄식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는데 유다 백성이 듣지를 않았다. 예루살렘이 멸망받는다고 했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켜버렸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을 해야 했다. 예레미야 선지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했다. 자기가 예언한 실상을 그대로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회개할 것이 있다면 빨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성도가 매를 계속해서 벌면 안 된다. 

 

예레미야의 고난(애 3:1-20)

 

시편 103편의 표제는 본장의 앞에 매우 적당하게 덧붙여질 수 있다.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 왜냐하면, 여기에서 쏟아지고 있는 불평은 매우 감동적이고 유창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하여 상세하게 관찰하여 보자. 그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Ⅰ.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이것은 공통의 원인이 되고 그 고통을 맛보게 한다(1절). "내로다." 유달리 고통을 당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매로 인하여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데, 그것은 잘라내는 칼로 써가 아니라, 바로잡기 위한 채찍으로서 불평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하자. 그것은 그들에게 현재는 슬픈 것일지라도 그 목적에 있어서 유익한 시련으로서 "진노의 매"인 것이다. 이 매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우리가 이 채찍으로 인하여 보통 고난보다 더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불평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진노가 정당하고 고난은 온순하며 자비를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Ⅱ. 그는 당황하고 있고, 캄캄한 어둠 속에 처해 있다. 어둠은 괴로워하게 하고 당혹하게 한다. 위로와 방향 지시를 갈망하게 한다. 이 불평하는 자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2절). 하나님은 그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내가 두려워하는 어둠에 행하게 하고, 내가 바라는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다. 그리고(6절) "나를 흑암에 거하게 하시니, 흑암은 죽은 지 오랜 자의" 무덤과 같다. 그곳은 아무도 그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아주 망각된 곳이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빛의 자녀라 할지라도 때때로 흑암에 행한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은 그에게 대하여 적으로서, 공공연한 적으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자주자주 나를 치신다" (3절).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자주 나를 치시도다.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4). 하나님의 손이 돌이켜 우리를 계속하여 치실 때에 우리는 그의 마음도 또한 우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시험에 빠진다. 어느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호 5:14) "내가......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다" 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말을 진실되게 하신다.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같으시며, 그의 심판으로 나를 놀라게 하며 은밀한 곳의 사자와 같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간 길이 어느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생명의 위험을 느꼈고, 나의 안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적들을 향하여 쏘는가? 그러나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쏘도록 정하여져 있는 활을 당겨서 이스라엘의 아들을 향하게 한다(12절).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나를 겨냥하고 나를 맞추려고 한다. "전통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그 살은 치명상을 즉 내적인 상처를 준다(13절). 하나님은 그의 전통에 많은 화살을 갖고 계시며, 그 살은 빠르게 날아서 깊이 박힌다는 것을 주의하자.

Ⅳ. 예루살렘은 몸, 마음 둘 다 심하게 고통받는 사람과 같다. 이 유대인의 상태는 지금 나이 많아 쪼그라든 사람과 적합하게 비교된다. 거기에는 약이 없다(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살과 가죽은 쇠약하고 마른다. 나는 곧 무덤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나의 뼈를 꺾으셨고, 그러므로 나는 나를 구원할 수가 없다(15절).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니, 이 재앙의 맛은 쓴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에 접근할 수 있고, 쓰게 하실 수 있으므로 그 영혼의 모든 즐거움을 쓰게 하시는 것이다. 위(胃)가 불결할 때는 그 안에 있는 먹은 모든 것이 불결한 것과 같다.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나의 고통의 맛으로 나를 취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말하고 행동할 줄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의 빵에 "조약돌"을 섞으셔서 그로 인하여 "내 이가 꺾어진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먹는 것이 즐겁지 않고 살로 가지도 않는다.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이것은 슬퍼하는 자들이 행동하는 것과 같다(어떤 것은 다음과 같이 읽힌다). "하나님은 재로 나를 양육하셨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시 102:9).

Ⅴ. 예루살렘은 도망가거나, 구원받을 길을 분간할 수가 없다(5절). "나를 에우셨으며, 요새와 포열(砲列)이 포위된 성읍을 향하여 세워졌다. 열린 한 길마저도 완전히 봉하여졌다. 담즙과 수고로 모든 면에서 나를 에우셨다. 나는 초조하고 안달이 나고, 피곤하여 도망할 길을 찾으려 하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7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포위되었을 때,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었다" 고 말하여졌다(눅 19:43). "나는 사슬에 매여졌다. 이름난 범죄자는 이중 족쇄(足鎖)로 채우고 또한 쇠를 짊어지듯이 여호와는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또한(9절)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셨다. 내 길을 가시로(호 2:6) 두를 뿐만 아니라, 관통할 수 없는 돌벽으로 길을 끊었으므로 나의 길이 굽게 하셨다. 나는 앞 뒤와 왼쪽, 오른쪽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해보나 여전히 되돌아오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로질러서 굽은 길로 행하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설계를 가로지르고, 그들의 수단을 깨뜨리고서 고난의 굽고 좁은 길로 걷게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11절)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그는 나의 모든 협의를 분쇄하시고, 나의 계획들을 깨뜨려 버리셨다. 그러므로 나는 파멸이 강요되었다. "내 몸을 찢으시며" 그는 찢고 그리고 탈취하여 가셨다(호 5:14). 그리고 "나로 적막하게 하셨다." 모든 사회로부터 나를 탈취하고 내 영혼에서 위로를 빼앗으셨다.

Ⅵ.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물리치신다(8절). "내가 진지하게 하나님으로 하여금 들으시게 하려고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나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귀는 그의 백성의 기도에 열리고, 자비의 문이 그것을 노크하는 사람들에게 열리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이 다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 에게까지도 닫혔다. 이렇게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백성의 기도" 에게까지도 노하시는 것처럼 보인다(시 80:4). 그리고 그들의 상황이 응답하시는 유익뿐만 아니라 수리하시는 위로까지도 거절되었을 때는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Ⅶ. 그의 이웃들은 그의 환난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그들 중에 있는 모든 악한 자들에게 줄 공적인 심판과,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의 슬픔을 가지고 그들 자신과 서로서로를 즐겁게 한 악한 자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노래요,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요, 그들의 침 뱉는 통(욥 17:6)이요, 그들의 노리개이다. 마치, 로마는 불에 타고 있는데 네로는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

Ⅷ. 그는 구원이나 구출에 대하여 절망하게 되어 있다. "주께서 나에게 평화를 빼앗으실 뿐 아니라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신다" (17절). 그러므로 평강은 나의 힘이 닿는 곳에 있지 아니할 뿐 아니라 보이지도 아니한다.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내가 복을 가졌던 때가 오래되고, 또 그것을 회복할 가망이 없으므로 나는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나는 슬픔과 노예 상태에 익숙해졌으므로 나는 기쁨과 자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사라져 버리고 결정 나 버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기까지 하였다.

"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나의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8절). 나는 하나님에게 내 자신을 더 이상 머무르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심을 발견할 수 없고, 또한 나의 환난이 끝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나타나심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 상처는 고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은 냉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의심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연약한 것이다(시 77:10).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힘" 이시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그 백성의 힘이시기 때문이다.

Ⅸ. 슬픔이 고난의 기억으로 인하여 되살아나고 그 영향은 그가 번영하였던 것만큼이나 침울한 것이다(19, 20절). "그는 불평을 잊기" 위하여 욥과 같이 애를 썼는가?(욥 9:27) 아! 그것은 소용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그의 고난을 강조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고난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고난을 회상할 때 그것은 무겁게 놓여 있었다. 재난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었다. "나의 고통과 나의 범죄"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나의 환난과 그 환난을 내게로 가지고 온 나의 죄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고초와 재난" 속에 있는 "쑥과 담즙"이었다. "고초의 잔으로 하여금 쓴 잔이 되게 한 것은 죄이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포위로 인한 모든 재난을 간직하고, 그들의 눈앞에 아직도 불타는 예루살렘과 파멸이 어른거리어서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다." 아니 그들은 결코 "예루살렘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시 137:1, 5).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니, 고난에 대한 감정으로 눌릴 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쓰라려서 낙심이 된다. 우리의 고통과 재난에 대한 모든 기억 위에 있는 죄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의 수치스러운 참회를 새롭게 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를 바로 잡고, 미래를 예방하는 것으로 인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욥기 3장 성경 주석 말씀] 생명을 원망하는 욥(욥 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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