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주일설교 말씀은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절기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았습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가심(요 7:1-13)
Ⅰ.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심 7:1-13
1. 그리스도께서 유대보다 갈릴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신 이유(1)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 해서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요 5:16). 여기에는 예수께서 감히 유대 지방에는 갈 엄두도 내시지 못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다니려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겁이 많고 심약해서가 아니라 신중한 생각에서 나온 조치였다. 왜냐하면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들로부터 그를 내쫓으려 하는 자들에게는 등을 돌리실 것이다. 위험이 임박했을 때 안전과 보전을 도모하여 물러나 앉아 위험이 적은 지역에서 섬김을 다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요, 권고할 만한 일이다(마 10:23). 정말 상 받을 만한 사람, 공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궁벽한 장소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까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우리 주님의 처지가 그러하였다.
그런데 주님은 갈릴리에서 조용히 은둔 생활을 하시지 않고 '다니셨다.' 주님은 이리저리 전을 행하시며 다니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하고자 하는 곳"에서 행할 수 없는 처지에서라도 "할 수 있는 바"를 "행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해야 하는 법이다.
2. 초막절이 다가옴(2)
초막절은 이스라엘 남자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야 하는 삼대 민족 제전의 하나였다.
이 절기는 그 당시도 경건하게 엄수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제도란 결코 흘러간 옛날 일도 아니며 시간이 오래 흘렀다 해서 구식이 되는 것은 아니며, 광야에서 받았던 은덕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와 형제들간의 담화(3-13)
이들은 예수께 관심이 있는 척하고 끼어들어 예수님의 처신에 대해 충고하고 나섰다.
(1) 여태까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보다 더 자주 대중들 사이에 그 모습을 나타내라는 주장 속에 은폐되어 있는 저들의 야망과 헛된 영광: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3절).
1)이들은 이 권유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그곳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후원했으면 하고 바라었으며 그가 갈릴리 제자들과 보내는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겼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날릴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4절).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알리고자 해왔다고 당연시했다.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때가 큰 인물로 부상할 수 있는 최적기이나이다."
2)복음서 기자는 이것이 저들의 불신앙의 한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그리스도의 육신의 친척이 된 것은 큰 명예임에 분명 하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명예를 입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예수께서 귀히 여기시는 친척이다.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의 친척이 된 자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도 있었으나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3)그들이 예수께 드린 충고에서 무엇이 그릇되었는가? 그들이 그리스도는 자신을 이끌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은 곧 그가 그들을 인도하리라고는 믿지 않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리고 유대 지방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그를 유대 지방으로 가게 하려고 한 일은 그의 안전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주의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갈릴리 출신 동료들에 대하여 싫증을 느껴 실제로 이 말은 예수께 그 지방과 결별하기를 바라고 한 말일 수도 있다. 또한 이들은 그가 자기를 대중적 활동 무대에 드러내지도 못하는 저열한 의식의 소유자요, 만일 그가 용기가 있고 위대한 혼을 가지고 있다면 대중 앞에 나섰지 이처럼 위험을 모면하여 시골 구석에서 슬금슬금 피해 다니지 않았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그를 비난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 일을 행하려거든'이라는 말 속에는 예수께서 역사하신 기적의 진위에 대한 의심이 게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일들이 고등 법원의 공적인 세밀한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면 거기에 가서 이 일들을 행해 보시오"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자기들과 동류의 인간으로, 자기들처럼 육에 속하여 공명에 욕심이 있는 인간으로 취급한다.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이기심이 깔려 있었다. 이들은 만일 그가 크게 출세한다면 그 친족들인 자기들은 그 덕을 보게 되리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공적인 의식에 참여하며, 그들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데 있다.
(2) 우리 주 예수의 신중함과 겸비함(6-8절): 이들이 한 말은 아주 비속한 아첨이었으나 예수께서는 온화하게 답변해 주셨다. 몹시 그릇된 것이 쉽사리 드러나는 일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못 본 척하시고 그들에게 온화하게 답변해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1)예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사람들과 자신이 다름을 보여 주신다. ①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의 때는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절). 쓸모없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겐 시간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즉 언제든지 즉석에서 아무것이든 할 수 있어서 자기를 마음 내키는 대로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야 될 일로 시간이 꽉 차있는 사람들은 흔히 시간에 쪼들려서 다른 사람들이 언제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직 할 시간을 못 갖는다.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이 게으른 자유보다 수천 배 나은 것이다.
무식하고 근시안을 가진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해 달라고 처방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현시대는 우리의 시대이지만 그러나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 그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②유대인들이 노리고 있었던 것은 예수의 목숨이었지 이들의 목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7절). 이 사람들은 세상에 그 모습들을 나타냈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들을 노출시킨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니 이는 너희가 세상에 속했기 때문이다." 거룩치 못한 영혼들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사랑하실 수 없는 존재이며, 사악함이 가득 찬 세상으로서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심으로써 큰 위험에 자신을 내맡기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경홀히 여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움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했는가?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7절). 악한 세상이 이루어내는 업적이란 악한 행사이다. 나무를 보면 그 열매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는 판결은 세상으로서는 대단히 불쾌하고 성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음에 대한 반기를 드는 원인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연막을 친다손 치더라도 그 적의의 실제적인 원인은 복음이 죄와 죄인에 대하여 그 실상을 증거하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의 사악한 흐름과 풍류가 되어 세상의 선심을 따내는 것보다는 그 사악함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나섬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사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예수께서는 당분산 갈릴리에 남아 계시겠다는 생각에서 이들을 물리치신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했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명절에 올라가는 것을 말리지 않으셨거나 동행하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행사에 참석하거나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급히 간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상경할 필요가 있는가? 중대한 행사에 오갈 경우 오염된 교제로 인하여 귀중한 정열이 식지 않도록 동료를 택하고 동행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예수께서는 "나는 아예 상경하지 않겠다"고 하신 게 아니라 "아직은 상경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하신다.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3) 그리스도께서 자기 때가 올 때까지 갈릴리에서 유하심(9절):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적에서 결코 이탈하지 않고자 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침착하게 일을 차근차근해 나가야지 경솔해서는 안될 것이다.
(4) 때가 오자 명절에 참석하심: (1) 예수께서 올라가신 때: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10절). 예수께서는 그 형제들이 상경한 후 뒤따라 올라가셨다. 세상에 눈이 어두운 그 형제들이 먼저 올라간 후 나중에 예수께서는 가셨다. 문제는 "누가 먼저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누가 보다 합당하느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중심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 앞서 누가 도착했느냐는 문제 될 바가 아니다. (2) 어떻게 그가 올라가셨는가? 예수께서는 마치 자기를 감추시듯,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올라가셨다. 효과적으로 성사되는 하나님의 일이란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은밀히 하되 절대로 미혹시키지 말아야 한다.
(5)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사이에 들끓었던 예수께 대한 기대(11-14절): 유대인들은 예수께 대하여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절). 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리라 생각하여 그를 한 번 보았으면 하고 기대하였다.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도 익혀 놓을 기회가 온다면 대단히 기뻐할 그런 심정이었다. 유대인들은 명절 중에 예수를 찾았다. 명절 중에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어쩌면 그들의 기다림이란 예수를 사로잡기를 원하는 원수의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은 "그가 어디 있느냐, 그 친구 어디 있어?"라고 떠들어댔다. 이와 같이 비꼬면서 경멸스럽게 그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로서 좋아라 하였다. 무리들은 예수께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달랐다.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12절). 그리스도에 대한 지배층의 적대 감정은 그에 관한 소문을 더욱 유발시켰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대에 부딪침으로써 오히려 설 자리를 얻은 것이다. 복음은 모든 곳에서 비방을 받음으로 해서 사방팔방에 복음에 대한 말이 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더욱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수군거림은 그리스도를 적대하여 한 수군거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관한 이야기였다. 즉 어떤 이들은 지배층이 그리스도를 지지하지 않으며 격려하지 않음으로 해서 지배층에 대하여 수군거렸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예수를 억누르거나 금하지 못했다고 수군거렸다.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은 논쟁과 논란의 주제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눅 12:51,52). 그러나 감옥과 같은 전제 정치에 의해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동의하는 것보다는 자유와 참견에 의한 떠들썩함과 논쟁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사실이었지만 전체에 비해 볼 때 대단히 국부적인 판단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전혀 나쁜 생각을 갖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견해는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말한 내용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그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아니다 무리를 미혹케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대단히 악한 자였다. 대제사장들이 그를 반대하고 헐뜯는 이유가 바로 그 기저에 밝혀지지 않은 어떤 속임수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집권층이 두려워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많은 얘기를 나누는 것도 꺼려하였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13절). 무리들은 예수가 좋다는 말도 드러내 놓고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서는 전혀 공공연하게 얘기하지 못하였다. 예수께 대해 좋지 않게 얘기하는 것이 전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입에 떠올림으로써 공연히 고통당하는 일을 피하고자 하였다.
[요한복음 3장 예수님 말씀] 믿음으로 받는 영생(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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