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두란노 서원을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가깝고도 먼 길”(눅15:11-24)
✱명제: 아버지를 떠나는 것은 쉬워도 돌아오는 것은 어렵다.
✱목적: 회개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와야 한다.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가깝고도 먼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가깝고 무엇이 멀까요? 아버지의 품이 가까우면서도 멀어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심적 거리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부부관계에 있어서 아주 잘 나타납니다.
이 ‘심적 거리감’은 육체는 가까이 있어도 마음에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부부나 가족이 함께 살아도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부나 가족관계의 심적 거리감은 몇 미터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도 적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은데 왠지 마음의 거리감은 멀리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녀의 믿음이 아니라 종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관계가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은 주인의 마음에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적 거리감을 부부관계나, 가족관계나, 인간관계에서 좁혀 가시기를 바라고, 신앙생활에서는 하나님과의 심적 거리감을 좀 더 가까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 아버지가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말씀해 주시기 위하여 이런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여기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줄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재산이 엄청 많은 분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서 자신이 관리하고 싶고, 자신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차릴 수 있도록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구속받고 싶어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것을 가지고 직접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 아들은 기분이 너무나 좋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아가지고 며칠이 지난 후에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됩니다.
(눅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인간은 자꾸 아버지의 품을 떠나려고 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모르는 아주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이렇게 떠나고 나서 작은 아들은 허랑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재산을 함부로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면서 재산은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작은 아들을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축복은 결국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관리를 받고 허랑방탕하게 살지 않았는데, 아버지를 떠나서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니 인생이 초반에는 즐겁고 기쁨이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재산이 유지가 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도 주님의 품을 떠나서는 관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은혜받았다고 이제는 영원히 은혜 가운데 살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삶에서 결국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는 영적인 말씀의 은혜는 없습니다. 나의 영혼은 황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 아들은 재산이 점점 없어지게 되고, 마지막에는 밥을 사 먹을 돈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먹고, 할 때에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품을 떠나서 스스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는 결국 은혜가 없고 영적인 굶주림으로 결국 굶어 죽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완전히 피폐해져서 결국에는 육신이 앙상한 뼈만 남듯이 영혼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고로 고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예수님의 복음으로 충만해져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생명수와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복음인 말씀 만나를 먹으면 영원히 주리지 않는 것입니다.
(눅 15:15-16)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에는 큰 권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받고 어디에 나가도 대접을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살겠다고 집을 나왔을 때부터 이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니 먹을 것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겨우 한 끼를 먹으면서 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사람의 집 한편에 붙어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돼지를 쳐야만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돼지를 치는 것은 불명예입니다.
이방 사람만이 돼지를 칠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고, 이 동물은 먹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돼지를 치게 되었고, 그리고 배가 고파 배를 채우려고 하는데도 돼지들만 먹는 쥐엄 열매도 누구 하나 주는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는 자는 결국 마지막에 돼지를 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에서 짓밟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배를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축복도 세상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의 축복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말씀으로 채워질 때에 배부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영적인 복음이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배고픔을 채우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사람은 고통이 오면 아버지가 생각나게 됩니다. 작은 아들도 아무것도 없고, 먹기 살기도 힘드니 아버지가 생각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찾아오면, 그때서 하나님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의 인생이 잘 나가고, 문제가 없고, 돈이 풍족하면 주님이 생각나지 않다가 돈도 떨어지고 하는 일마다 안 되면, 그때서 하나님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올까?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이때에 다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으면 그 인생은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작은 아들은 아버지와의 심적 거리감이 아주 멀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나를 진노하시지는 않을까? 혼자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절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 마음이 멀어져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눅 15: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 아들은 결정을 합니다. 그래 내가 살길은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차피 나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고 아버지의 아들로 살지 못한다면 종으로 살아도 좋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께 죄인입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혼자 방황하면서 고통을 당하느니 아버지의 품에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인생에서 방황하고 있고, 신앙과 믿음에 방황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아버지는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눅 15:20-21)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합니다. 아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버지는 목을 안고 기뻐하면서 입을 맞추어 줍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께 회개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살기에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회개를 통해 모두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습니다.
(눅 15:22-2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여 제일 좋은 옷을 입히게 하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로운 신발을 신게 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이것은 종과 자녀의 차이입니다. 회사 직원이 사장의 돈을 횡령하여 도망갔다가 모두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에 사장이 잔치를 베풀어 주겠습니까? 절대 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겠지요? 그런데 사장의 아들이 돈을 다 탕진하고 돌아오면 감옥에 넣습니까? 절대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왔을 때에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 옷입니다. 그리고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것은 죽었던 인생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죄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으니 얼마나 기쁨이 크겠습니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얼마나 아버지는 감개무량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죄악 가운데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났으니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합니까? 이제 우리는 나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생각하지 않고 있어! 이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혼자의 생각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는 너무나 먼 길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오는 길이 가까우면서도 먼 길 같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먼 길 같지만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종이 한 장 차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제 우리가 아버지의 품에 있다면 절대로 평생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에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도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에 이겨내기가 쉽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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