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누가복음 18장 헬라어 주석 강해] 영생에 관한 교훈 말씀(눅 18:24-30)

두란노 서원 2021. 5. 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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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8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영생에 관한 교훈 말씀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십계명을 지켰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얼굴에 근심이 들어갔습니다. 계명을 지켰다고 할 때는 당당하게 말했지만 자신의 소유를 팔라고 했을 때는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영생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팔아서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재물 욕심 때문에 영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정욕에 빠지면 영생을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에 파묻혀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영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영생에 관한 교훈 말씀(눅 18:24-30)

 

24절 이돈 데 아우톤 호 이에수스 페릴뤼폰 게노메논 에이펜 포스 뒤스콜로스 호이 타 크레마타 에콘테스 에이셀류손타이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눅 18: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18:24

어떻게 어려운지(포스 뒤스콜로스) - 이 말은 '얼마나 어려운지'가 보다 정확한 의미이다. 이는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며 나아가 그 일이 본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성경은 부자가 영생을 얻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부자가 영생을 얻기 힘든 이유는 (1)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함으로(52:1-6; 18:11; 딤전 6:17), (2) 부의 축적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을 압제함으로(18:23; 22:13-19; 6:17-19; 요일 3:17), (3) 치부하고자 하는 탐심 때문에(12:15-21; 16:13-31),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재물뿐만이 아니라 천하 만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관리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그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25절 유코포테론 가르 에스틴 카멜론 디아 트뤼말리아스 라피도스 에이셀데인 에 플로우시온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에이셀데인

눅 18: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18: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 흔히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본절에서 '낙타''바늘귀'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예수께서 의도하신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기에 알맞은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작은 문이 있었다고 한. 이 작은 문은 바늘귀 문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표현은, 약대가 이 작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에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 하나는 '약대'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멜로스'인데 발음이 이와 비슷하게 들리는 '카밀로스'란 단어는 선박용 밧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밧줄'을 바늘귀에 꿰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쉽다는 비유로 이해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의도하는 바는 부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이 소유하여 즐기는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19:23; 10:23).

26절 에이폰 데 호이 아쿠산테스 카이 티스 뒤나타이 소데나이

눅 18: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18:26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여기서 '구원받다'는 말은 '영생을 얻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은 '그렇다면 구원을 얻기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그토록 어렵다면 어느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If it that hard, how can anyone be saved?)라고 옮겼다.

예수와 부자 관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개념상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1:10), 당시 종교적 관행상으로 볼때 이 관원의 행실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듯이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7절 호 데 에이펜 타 아뒤나타 파라 안드로포이스 뒤나타 에스틴 파라 토 데오

눅 18: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18:27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이는 부자 관원과 나누신 대화의 결론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관원에게 예수께서 십계명 중 일부를 제시하신 것은 사실상 그 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고백케 하시기 위함이었.

왜냐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령 율법의 한 부분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을 범하고 마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은 '다 지켰노라'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따라서 예수는 관원이 부자이고 그의 마음이 물욕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허를 찌르는 요구를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두 번째 요구 말씀도 실천을 요청하신 것이라고 보다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이 관원이 설령 예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였다고 해도 그 행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28절 에이펜 데 호 페트로스 이두 헤메이스 아페카멘 판타 카이 에콜루데사멘 소이

눅 18: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18:28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일시적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예수의 대답(27)을 듣고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관원이 하지 못한 그 일을 자신들은 해왔다고 하는 정열적 고백과 확인 요구의 말씀을 한다.

19:27의하면 베드로는 이 말 뒤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란 말을 덧붙인다. 부자 관원과는 틀리다고 하는 자부심을 은근히 비춰주는 베드로의 말은 처음 그가 예수를 만나 따라나설 때의 극적인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4:20).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가 헌신적인 결단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이르게는 되었지만 예수의 공생애 당시만 하더라도 메시아관이나 천국관에 있어 많은 오해를 지니고 있었고 인간적 나약함이나 무지로 말미암은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어야 했던 것이다(14:66-72).

본절의 경우는 은근히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과시욕과 예수의 말씀에 담긴 속 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아둔함을 드러내 보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아마 제자들은 부자 관원에게 하신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을 것이다(22).

29절 호 데 에이펜 아우토이스 아멘 레고 휘민 호티 우데이스 에스틴 호스 아페켄 오이키안 헤 고네이스 헤 아델푸스 에 귀나이카 에 테크나 헤네켄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눅 18: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18:29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 19:29에 의하면 '내 이름을 위하여'이며 막 10:29의하면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이다. 따라서 예수와 그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됨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계신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다.

집이나...자녀를 버린자는 - 누가가 포기의 대상(물건, 사람)으로 삼은 것은 마가가 명시한 것과 다르다. 누가는 마가가 기록한 '전토'(田土)를 생략하고 그 대신 ''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그가 버려야 할 대상을 주로 인간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Marshall).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좇기 위해 그들의 가정과 직업까지도 포기함으로써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무엇인가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금생과 내생에서 충분히 넘치도록 다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한 사람이 안정된 직업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금생과 내생에서 그 자신과 안전된 영원한 관계를 갖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가족의 친성(親性)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의 사랑을 얻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데 수반되는 희생 대가를 지불했다.

아울러 예수께서도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보상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포기한 것에 대해 미련을 두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우리가 포기한 것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불가피한 포기나 헌신은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써가 아니라 구원에의 확신에 따른 자발적 순종의 표시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30절 호스 우 메 아폴라베 폴라플라시오나 엔 토 카이로 투토 카이 엔 토 아이오니 토 엘코메노 조엔 아이오니온

눅 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8: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 누가와 마태는 단지 '여러 배'(many times, NIV)받는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백 배'라고 하여 최상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19:29; 10:30). 또한 마가는 '핍박을 겸하여' 받게 됨을 지적하고 마태는 굳이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축복을 시사하지만, 누가는 현세의 보상에 비교적 강조점을 많이 두었다.

본절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단지 물량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보상의 기준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면 성도들이 물질적 축복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면 단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세속적 탐욕의 노예가 되면 백만장자가 되어도 불만과 번민에 시달릴 수 있는 것이다.

요컨, 문제는 누림의 질에 있는 것이지 그 양에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현실에는 핍박과 고통이 함께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물질적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는 역설적 충족감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고후 6:10).

[로마서 7장 헬라어 주석 강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롬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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