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야고보서 2장 헬라어 강해] 행함으로 입증하는 참된 믿음(약 2:14-19)

두란노 서원 2021. 6. 2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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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야고보서 2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행함으로 입증하는 참된 믿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말하는 성경구절이 야고보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이 구절을 가지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것만 보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제 멋대로 살고 자 범죄를 지으면서 거룩하지 못하게 사는 자들을 위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무법 방종 주의자들은 율법을 폐기하여 구원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자들의 영향을 받아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거룩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 범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이 온전히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올바른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행함으로 입증하는 참된 믿음(약 2:14-19)

 

14절 티 토 오펠로스 아델포이 무 에안 피스틴 레게 티스 에케인 에르가 데 메 에케 메 뒤나타이 헤 피스티스 소사이 아우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 '만일 사람이...하고'는 가정법을 수반하는 조건문으로서 가식적인 믿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는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은 전혀 가치가 없는 거짓이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있노라 신앙 고백을 하면 서도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서 행함이 전혀 없다면 구원에 있어서 유익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한편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 오펠로스'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할 때 자주 쓰는 수사 의문문이다(Ropes, Robertson).

야고보는 조건문과 비난을 나타내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해서 말로만 '믿음'이 있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다. 참된 믿음은 거듭남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기에 거듭났지만 변화되지 않은 믿음은 피상적인 것이며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 뒤 나타이 헤 피스티스 소사이 아우톤'이다. 야고보는 부정 불변화사 ''를 처음에 사용하여서 본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정적인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해 낼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이나 실제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사용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울이 주장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바울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서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 반면에 야고보는 '복음' 안에서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드러내고 동시에 복음 안에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Adamson, Ropes).

15절 에안 데 아델포스 에 아델페 귐노이 휘파르코신 카이 레이포메노이 오신 테스 에페메루 트로페스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절 에이페 데 티스 아우토이스 엑스 휘몬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 데르마이네스데 카이 코르타제스데 메 도테 데 아우토이스 타 에피테데이아 투 소마토스 티 토 오펠로스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5,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예로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찾아가서 몸에 쓸 것을 구했을 때 살 것은 주지 않고 말만 하는 자를 들고 있다. '형제나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자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결속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낸다. 한편 '헐벗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귐노이'는 '벌거벗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초라한', '남루한' 옷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궁핍한 자들이 절망의 상태에 있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Burdick). 또한 '일용할'의 헬라어 '에페메루'는 '하루를 지내기 위한'의 의미로 하루하루 연명할 양식을 가리킨다(Adamson). 야고보는 본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옷과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들에게 행함이 없이 믿는 자들이 하는 세 가지의 '위로의 말'을 예로 들어 그러한 말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평안히 가라 - 이것의 헬라어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는 히브리어의 '레쿠 레샬롬'에서 유래된 말로서 유대인들이 헤어질 때 사용했던 통례적인 인사법이었다 (18:6; 삼상 1:17; 20:42; 삼하 15:9; 5:34; 눅 7:50; 8:48). 걱정이 쌓여있는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 자'에게 이러한 인사는 무의미한 것이다.

더웁게 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르마이네스데'는 중간태로 '스스로 불을 지펴서 덥게 하라'는 의미이다(눅 22:55; 18:18,25). '옷을 입어라'라는 의미로 앞절에서 언급한 '헐벗은 것'에 대한 반대어이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옷을 따뜻하게 입을 능력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위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배부르게 하라 - 이것의 헬라어 '코르타제스데'는 본래 가축을 방목하여 키울 때 스스로 풀을 찾아 먹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수동태로 해석하나(Mayor, Adamson) 중간태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4:12, Robertson, Davids, M-artin). 만약 수동태로 본다면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한 사람을 더웁게 해 주고 배부르게 해 주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네가 알아서 스스로 배부르게 하라'라고 위로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며 합당치 못한 것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 불행한 자들의 몸에 쓸 것을 채우지 않고 앞서 언급한 세 종류의 공허한 말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차갑게 하는 것이며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떠벌리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요일 3:18).

17절 후토스 카이 헤 피스티스 에안 메 에르가 에케 네크라 에스틴 카드 헤아우텐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본절도 역시 가정법을 수반하는 조건문의 형식으로 '만약 계속해서 행함이 없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실된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난다.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자체'에 해당하는 헬라'카드 헤아우텐'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죽은 것 즉 본질적으로 죽은 것을 시사한다(Mayor).

야고보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요, 헛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이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렇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한다(Burdick).

18절 알르 에레이 티스 쉬 피스틴 에케이스 카고 에르가 에코 데익손 모이 텐 피스틴 수 에크 톤 에르곤 수 카고 데익손 소이 에크 톤 에르곤 무 텐 피스틴 무

약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 헬라어 본문에는 '혹이 가로' 이하에는 구두점이 없다. 그래서 '혹이 가로되'가 수식하는 말이 어디까지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나는 행함이 있으니'까지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이러한 수식절의 ''(아고)''()가 반드시 야고보와 다른 반대자를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을 지칭할 따름이다(Ropes, RSV, NIV). 한편 본문은 '너는 믿음이 있느냐? 나는 행함이 있다'라는 의미로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이것은 믿음이 없는 행함이 있을 수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Tasker).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문은 반대자의 주장에 대한 야고보의 답변으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자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호된 질책이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피스틴 수 코리스 톤 에르곤'에서 '... 없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리스'는 '... 로부터 분리된' 번역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 이것은 '행함''믿음'의 분리를 시사한다.

그러나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하여 나타날 수 없으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함이라는 결과가 입증될 수 없다. 단순히 입술로써 고백만 한다고 해서 그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속 사람의 마음가짐인 믿음을 통하여 행함의 열매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Hort). 그래서 야고보는 반대자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써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를 증거 하겠다는 것으로서 행함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임을 시사한다(Robertson).

19절 쉬 피스튜에이스 호티 호 데오스 헤이스 에스틴 칼로스 포이에이스 카이 타 다이모니아 피스튜우신 카이 프릿수신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19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리라 - 본절에서 야고보는 다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고백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해 언급한다. 함은 없고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자들의 고백인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유일신을 믿는 믿음에는 야고보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확실한 교리로서 기본적인 것이다.

또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 자체는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믿고 따라온 중요한 교리이다(6:4, Mussner). 그러나 그 교리 자체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그 정도까지는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은 귀신들도 마땅히 아는 바이다(1:24). 그러나 귀신들이 하나님께서 유일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지만 그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다만 떨게 할 뿐이다.

'떠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릿수신'은 '털이 곤두서다', '떨다'를 의미하는 '프릿소'에서 유래한 단어로 극도의 공포심 때문에 머리 끝이 곤두서는 것으로 영적인 불안과 공포를 의미한다(Manton).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일신이시다'라는 믿음은 귀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입으로만 시인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내적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인격체를 만들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며 외적으로 믿음에 대한 행함을 나타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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