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장에서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나님께 서원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은 한나의 서원 기도를 듣고 아이를 주셨는데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사사이며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다. 한나의 서원을 통해서 사무엘이 나왔고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엘리 제사장 밑에서 하나님의 일을 배우고 성막에서 하나님을 경배하여 섬겼다.
한나의 기도와 사무엘 출생(삼상 1:1-28)
엘가나와 그의 가정 상태(1-5)
• 1:1-5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기록되었으므로 사무엘이 에브라임 지파 같으나 그가 제사장이 된 것을 보면 레위 지파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레위 지파가 아니면 제사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는 역대상 6:16-28에 엘가나가 레위 족속에 속한 사실이다. 레위 지파 사람이지만 에브라임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에브라임 사람이라 하였을 것이다.
엘가나에게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는 자식이 없었다. 구약시대에는 아내를 여러 얻는 것도 용납되었다. 엘가나가 실로라고 하는 곳에 있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었다. 엘가나의 온 식구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제사드리는 날에 엘가나가 제물을 나누어 줄 때 브닌나와 그 자녀들에게도 주었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나로 성태치 못하게 하셨으므로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아무리 제물의 분깃을 갑절이나 받고 또 남편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잉태하지 못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번민과 고통이 있었다.
브닌나가 한나를 핍박함(6-8)
• 1:6-8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는 잉태하지 못한 것 때문에 늘 브닌나의 격동을 받아 번민케 되었고 마음이 편안치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왜 한나에게 잉태하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한나를 잉태하지 못하게 만드신 것은 그로 인하여 낮추고 시험하여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고 또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광야길로 인도하신 것과 같다(신 8:2, 16 참조). 가까운 길로 인도하시면 며칠 만에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는데 광야길을 빙빙 돌게 만드시고 40년 동안 큰 시험과 환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고 시험하여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한나에게 잉태하지 못하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이다.
브닌나가 자주 한나를 격동시킨 것은 한나의 연단을 위한 시험이요 가시이다. 즉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브닌나를 가시로 주어 격동시키고 번민하게 만들고 고통을 주어 마침내 좋은 신자가 되게 하여 복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교만하여져서 망하지 않도록 바울을 낮추시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바울을 통하여 끝까지 성공시키기 위한 연단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고후 12:7-10).
한나가 순조롭게 잉태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것도 없었고 하나님께 매달려 부르짖을 것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제물을 갑절이나 줄 만큼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5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재물로 바칠 만큼 경제적으로 유족하였는데(24절), 거기에다 잉태하여 아들까지 낳았다고 하면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었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태하지 못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한나를 낮추셨다. 잉태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주 격동을 받은 한나는 더욱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로 기도하게 되었고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나가 낮아지고 겸손하여 하나님만 의뢰하는 좋은 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를 낮출 만한 결함이나 결점을 주신 것 같다. 무엇 한 가지라도 잘되면 의기양양하다가도 자기의 결함이나 결점이 나올 때는 거기서 낮아지고 교만하던 것이 쑥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가시를 주시는 것이다. 베드로도 졸기를 잘하는 결점이 있었다. 변화산에서 졸았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도 졸았다. 또 성격이 과격하여 환도를 빼어 말고의 귀를 베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것들은 다 결함이요 결점이지만 이것 때문에 베드로는 더욱 겸손하여지고 좋은 사도가 되었다. 베드로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교만이 나오려고 하다가도 “아!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을 몇 번 모른다고 하였는가? 나는 말고의 귀를 벤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는 그만 교만이 쑥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각 사람에게 단점과 가시와 시험하는 것이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그 사람을 낮추시려는 것이다. 사람마다 무엇인가 낮출만한 가시가 있어야만 낮아질 수가 있게 된다. 엘리 제사장도 아들은 있었지만 아들들의 못된 행실로 낮추고 연단하셨으며(2:12-17), 사무엘도 그 아들들이 아비의 행실을 따르지 않고 불의한 행동을 하였으므로 그것으로 사무엘을 낮추셨다(8:1-3). 대개 사람들은 아무 결함이나 결점이 없이 늘 평안하고, 가는 데마다 대접을 잘 받고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어야 그것이 하나님의 복인 줄 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그런 평안한 환경 가운데 가만히 놓아두시지 않고 어떤 사건을 통하여서라도 낮추시고 연단하시어 하나님 앞에 버림받지 아니하고 마침내 복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결함과 부족한 면을 붙들고 늘 겸손하며 낮아져서 자기를 만들어 가도록 힘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되지 못한 것, 잘못한 것, 죄지은 것을 늘 붙들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교만하지 않도록 자기를 만들어 가야 된다. 일평생의 원수가 자기인 줄을 알아야 한다. 곧 자기가 제일 큰 원수이다.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나아갈 때는 생명의 역사가 있는 때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가 살아서 자기가 중심이 되면 영적 생명이 끊어지는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여야 된다. 하루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때는 자기가 살아나고 자기가 살아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막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막는 것은 언제나 자기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하였다. 또 고린도전서 15:31에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
오늘에 자기를 죽인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 가운데 제일 작은 자요, 성도라 일컬음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다. 자기가 교회를 핍박하고 또 스데반을 죽일 때 주도적 역할을 한 죄를 붙들고 통회하고 낮아진 것이다. 자기를 죽이지 못하면 성경을 다 알아도 쓸데가 없다. 도리어 교만하여진다. 마치 강도에게 칼을 준 것과 같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먼저 강도질하려는 속마음을 없앤 다음에 칼을 취면 그 칼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의 강도는 그냥 두고 칼만 쥔다면 죄만 짓고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강제로라도 낮추어 자신을 부인하고 낮아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하나님의 강제적 징계가 오기 전에 미리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낮아진다.
한나가 브닌나의 격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아 아직도 다 만들어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참 신앙에 섰다면 남이 자기를 격동할지라도 격동받지 않게 된다. 격동받는 자체가 한나에게는 아직까지도 만들어질 것이 많다는 증거이다. 또 원통히 생각하고 번민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 자체가 그만큼 되지 못한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도 격동을 받으셨을까? 예수님은 아무리 격동시켜도 격동을 받지도 않으시며 분한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한나는 깊은 도(道)에 도달하지 못한 신자이지만 보편적으로 신앙이 아주 좋은 신자이며 영에 속한 신자이다. 반면에 브닌나는 육에 속한 신자로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브닌나는 육신의 것을 가지고 만족하고, 육신의 것 때문에 질투하고 남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아들 딸을 낳았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뽐내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아이 낳지 못한다고 멸시하며, 또 남편이 한나를 더 사랑한다고 질투한 것을 보아 분명히 육신 중심이요 육에 속한 신자이다.
한나는 신령한 은혜 속에 있는 신자이다. 2:1-2에서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뿔이 높아졌고 여호와와 같은 반석이 없고 주 밖에 다른 이가 없다고 기도한 것을 보아 한나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신자이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생활에서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없애려고 자주 격동을 받게 하신 것이다. 본래의 신앙은 좋으나 표준까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뿐이다. 한나의 신앙은 좋은 편이지만 더 좋은 신앙 인격을 만들려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브닌나로 하여금 한나를 핍박하게 하였다.
육에 속한 신자가 영에 속한 신자를 핍박하고 학대하고 격동을 시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계집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이고 다른 한 아들은 자유하는 여자 사라에게서 난 이삭이다. 그 계집종의 아들이 이삭을 희롱하고 핍박하였다.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하였다(창 21:1-13 ; 갈 4:21-31). 여기에서 한나가 낳은 사무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똑같은 의미의 영에 속한 아들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을 때에 언약으로 인하여 이삭을 낳았고 이 언약은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다. 사무엘에게는 그러한 약속이 없었으며 다만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를 핍박하는 면이 엘가나의 가정과 아브라함의 가정이 같다는 것이다.
육에 속한 이스마엘이 영에 속한 이삭을 핍박하였고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시키고 핍박하였다. 육에 속한 신자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육신의 것이 부요해지는 반면에 영에 속한 자는 세상에서 환난과 궁핍을 당한다. 요한계시록 2:9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라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2:10에 “․․․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하였다.
한나가 경건하게 살려고 하므로 핍박을 받았고 진리를 지키려고 하므로 시험을 당하게 된 것이다. 격동시켜도 격동을 받지 않으며 육에 속한 모든 것을 초월하고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가 그 진리에 바로 서서 나아가면 점점 자신이 만들어지게 된다. 격동받는 일 때문에 한나는 기도를 많이 하며 하나님을 더욱더 간절히 찾게 되었다. 이제는 한나가 하나님을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 자신의 인격이 잘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복 받은 것이요 감사한 것이다.
한나의 기도와 서원(9-18)
• 1:9-18 그들이 원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엘리 제사장이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고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하는 것은 나실인을 삼겠다는 뜻이다. “나실인”은 자신을 성별(聖別)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이다(민 6:2-8). 한나가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하였는데 기도할 제목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핍박과 환난 속에서 자기의 부족한면(단점, 즉 해산치 못하는 것)과 외부에서 격동시키는 일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할 재료를 주신다. 한나는 영에 속한 신자이지만 그 신앙이 많이 자라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로 인하여 기도하게 하셨다.
그러나 신앙이 좀 자라나면 어떤 기도를 하게 되는가?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12:23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도는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원 운동을 위한 기도이다. 또 욥은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다.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늘 기도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택한 백성)의 구속을 이루기 위하여 늘 기도하셨다. 또 십자가를 앞에 놓고 그것을 승리적으로 통과하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이런 성경의 증거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정도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기도할 재료를 주시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 기도하도록 만드신다. 고상한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급의 기도라도 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즉 이스라엘을 위하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는 고상한 기도이다. 이런 기도를 하지 않고 이기주의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자기 개인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생긴다. 즉 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작은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정된 것도 기도하므로 받도록 예정된 것이 많다. 황무했던 곳을 회복시켜 에덴동산과 같이 하여 주시되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여야만 이루어 주신다고 하였다(겔 36:35-37).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도록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실 때에는 결과만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방편도 예정을 하셨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도 예정에 들어간다. 예정되었으면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기도할 때 이루어 주시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기도할 재료를 주신 것이다. 그가 아이가 없는 것 때문에 기도하였고 기도하므로 장성한 신앙이 되었다. 기도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이상의 것, 좀 더 큰 것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기도의 재료로서 좋은 것을 주신 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라고 하였다(딤전 6:6-8).
한나의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으로 더불어 해결하자는 것이다. 브닌나가 자주 격동시켜 마음이 격동되고 번민하여 괴로워도 더불어 싸우지 않고 또 자기의 수단이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아무리 환난과 핍박이 들어오고 또 대적이 나를 죽을 지경에 빠뜨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되며 적개심을 품어서도 안 된다. 오로지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독교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종교이다. 원수를 미워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도 기도가 막힌다(마 5:23-24 참조). 한나가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요”한 것을 보아 하나님과 잘 통해진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이나, 섭섭한 마음이나 싸우겠다는 마음이 없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한 한나의 신앙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원수가 와서 포위하고 쳐들어오겠다는 편지를 펼쳐 놓고 하나님께 기도한 히스기야왕의 신앙과 같다고 볼 수 있다(사 37:14-20).
또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과 통하며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기도였다. 어떠한 문제 때문에 기도하든지 하나님을 발견하고 교통 하며 깊이 사귀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된다. 그런 기도가 참 기도이다. 한나는 마음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지기까지(2:1) 기도하였고 또 뿔이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지기까지 기도하였으니 영적 권세(뿔)가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졌다. 또 한나의 기도는 여호와를 발견하여 주밖에 거룩한 자가 없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기도요 또 하나님이 자기의 견고한 반석이요 피난처와 방패가 되는 데까지 나아가는 기도였다(2:2). 한나는 처음엔 격동이 너무 심하고 고통과 환난의 원인이 되는 자기의 약점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였지만 기도하는 동안에 영적 세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좀 더 발견하고 영혼이 많이 자라났다.
산에 기도하러 갈 때 기도할 조목(條目)을 여러 가지로 적어 가지만 며칠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점점 그것이 다 쓸데없어지고, 하나님이 나와 점점 가까워지며, 나의 반석이 되고, 피난처가 되며, 나의 즐거움이 되며, 나의 모든 것이 됨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그 종이쪽지를 내어버리게 되며 그 대신 남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고 즐거운 것도 하나님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 한 분 모시므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기도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는 동안에 사욕은 다 없어지고, 자기라는 것도 점점 깨어지고, 하나님과 영적 세계가 발견되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하나님을 많이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 일곱보다도 더 크다. 그러기 때문에 한나가 “전에 잉태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라고 말하였다(2:5). 한나가 아이를 하나 낳아 놓고 일곱을 낳았다는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들 일곱보다 더 낫다는 말이다. 벌써 영적 세계는 7배나 커졌고 영적 생명의 역사도 7배나 장성해졌고 하나님을 7배나 더 많이 발견하였으므로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것이다. 이사야 56:3에 “․․․ 고자도 나는 마른나무라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기도할 때 아들 일곱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도한 결과는, ① 기도하는 도중에 더 좋은 것을 발견하여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게 되었고, ②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이 되었고, ③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이 되었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의 나라(이스라엘)를 위하여 아들을 바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이다. 이 기도는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이다. 왜 이러한 기도가 나오게 되었는가? 한나는 브닌나가 자주 격동 시켜서 죽을 지경에 빠져서 한나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런 난관을 주걱서 아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바칠 마음이 우러나게 하신 것이다. 사람이 죽을 난관에 빠질 때에는 “이번만 하나님이 살려 주시면 이제는 주를 위하여 일하겠습니다.”하는 서원이 나오게 된다. 한 번만 건져 주시면 주님을 위하여 전적으로 충성하겠다고 한다.
처음부터 브닌나가 아이를 낳을 때 한나도 낳고, 또 브닌나가 둘을 낳을 때 한나도 둘을 낳았더라면 한나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힘쓸 생각이 그렇게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주 환난이 들어오고 어려움이 들어오므로,“이제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겠다.”하고 돌이켰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나가 아이 낳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한나가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며 하늘나라만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신 것인데 그대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려는 마음과 아들을 낳아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바치려는 생각이 나게 되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도 자기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려는 것이다.
기도할 때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위하고 그의 의를 위하는 기도, 그의 나라를 위하는 기도를 하여야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 나아간다면 만족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지경에 들어가는 기도가 바로 된 기도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는데 한나의 기도가 거기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정욕으로 쓰기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 주시지 않는 것이 도리어 사랑이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기도하는 것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므로 만일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더욱 욕심으로 구하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약 4:1-3).
그러므로 우리가 한나의 기도를 본받아 영적 세계로 들어가 하나님을 깊이 사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반석이 되는 것을 깨닫고, 뿔이 높아지는 데까지 나아가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데까지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께 바쳐서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구속의 주만 남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회생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고 십자가의 죽음도 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주의 전을 위하는 열심이 자기를 삼켜 멸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엘리는 한나가 취한 줄로 알아 포도주를 끊으라고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을다 아시고(마 6:8), 소리를 내지 않아도 다 들으신다.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기도할 때 주의할 것은 기도하다가 졸지 않아야 하고 또 잡념이 들어오지 않도록 일심정력을 다하여 기도해야 한다. 소리를 내지 않는 기도가 영적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깊은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인데, 영과 영이 통할 때에 소리를 내는 것은 도리어 방해가 된다. 깊은 기도는 영이 통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해야 된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며 영의 움직임이 별로 없고, 외부적 감정에만 치우치기 쉽다. 큰 소리를 지르면 힘이 나고 어느 정도 감동이 있으나 이것은 외부적 감동이요 육신의 감정에 불과하다. 영의 깊은 데서 영이 움직여서 나오는 감동이어야만 참 생명이 있다. 육신의 감정에서 나오는 감동과 힘은 사실상 영의 세계에 들어가는 데는 방해물이다. 외부적인 것이 너무 클 때 그것을 가지고 만족하여 영의 것을 사모하지 않게 된다. 외부적(육신적)인 감정을 부인하고 한 계단 더 높이 올라가야만 영적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영의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고 일생 동안 외부적 감정 운동만 하다가 가게 된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찬송하고 영으로 찬송해야 한다(고전 14:15). 감정으로 하는 세계가 너무 크면 영으로 하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감정 세계의 것을 부인하고 영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서 성령의 감동에 의한 영의 움직임이 있어야만 된다. 외부적인 위력에 압도당하여 어느 정도 감동과 힘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의 힘이 아니다.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 한나의 기도는 영의 세계에서 영으로 통하는 기도이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엘리 제사장이 한나가 기도하는데 술에 취하여 있는 줄 알고 오해하였다. 그래도 한나에게는 섭섭한 마음이 들어오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이 들어왔다고 하면 벌써 그것은 마귀의 세력에 말려들어 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다른 사람이 오해해도 섭섭한 생각이 들어오지 않아야 된다. 불완전한 인간은 언제나 오해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신앙에 바로 서야 된다.
한나가 아들을 낳음(19-20)
• 1:19-20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한나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다. 사무엘은 쉐무아(들으심)와 엘(하나님)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다. 여호와께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을 한나가 깨닫고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시 116:1-2).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림(21-28)
• 1:21-28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사무엘이 젖 떼기까지 집에서 기르다가 젖 뗀 다음에 그를 데리고 하나님의 전에 가서 하나님께 바쳤다. 사무엘이 몇 살까지 젖을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스라엘에서는 4, 5세까지 젖먹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젖을 뗀 후에 데리고 실로로 갔는데, 그때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바치려고 가지고 간 것이다.
특히 소 셋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하는 제사로서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피를 흘려 죄를 대속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제사를 이렇게 바로 드리는 신앙이 있어야 아이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한나는 아들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봉사자로 바쳤다. 또 가루는 희생의 상징이다.
한나가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킨 것이 훌륭한 점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서원하지만 그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할 때는 “아이를 낳으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지만 낳은 다음에는 바치지 못하는 자가 많고, 또 병들어 죽어갈 때에는 “이번만 건져 주시면 내게 있는 재산을 다 바치고 내 몸까지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하던 자도 다 나은 다음에는 십일조도 바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그대로 갚아야 한다. 신명기 23:2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감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라고 하였다.
바로왕은 재앙이 내려올 때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다고 서원하고 그 재앙이 지나가면 또 강퍅하여졌다. 재앙이 내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를 불러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였으나 그 재앙이 지나가면 다시 강퍅하여졌다. 이렇게 마음이 강파하여져서 서원한 것을 갚지 아니하곤 하다가 마지막에는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고 짐승의 첫 새끼도 다 죽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냈다. 내어 보내 놓고 또 마음이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다가 군사들이 홍해에 빠져 몰살당하였다.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바친 일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던 것과 같은 신앙이라고 보아야 된다. 그 아이를 데려다가 하나님께 바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평생 하나님께 바침이 되어 하나님께 바친 자로서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창세기 오늘 성경말씀] 사탄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창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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