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사사 기드온 강해설교문] 여호와가 다스리신다(사사기 8:22-23)

두란노 서원 2021. 2. 1. 20:59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사 기드온 강해 설교문 중에서 여호와가 다스리신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족속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사 기드온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분은 주님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호와가 다스리신다(삿 8:22-23)

 

삿 8:22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 지라 

삿 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우리 한국사람에게 가장 친밀한 나무는 소나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 안에 많고 많은 수목이 있지만 하필 소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은 소나무의 형태 속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적 모델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나무는 가지가 사방으로 뒤틀려있고, 바람에 시달려 싸워온 아픈 흔적이 많은 나무입니다. 평탄한 곳보다 돌과 바위로 된 험한 산골과 벼랑에서 또 끝없는 겨울의 수난 속에서도 푸른 잎을 지켜온 소나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소나무를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역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안에서 일어나는 바람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한국의 역사를 절망에서 출발해서 희망을 향해 가는 역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고생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온 사람 같다. 4천 년이 넘는 역사에 우리는 태평시대를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나 고난의 짐을 진 자들아, 오라! 수난의 겟세마네의 밤은 깊었다. 이제 우리도 고난의 누더기를 이제 그만 벗자"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로 시대의 흐름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민족의 수난과 위기를 겪을 때마다 히브리 민족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공통적 분모를 찾고 위로를 얻습니다. 먼저 창세기에서 출발되는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오점과 실패로 시작됩니다. 창세기 1-11장까지 이어지는 우주의 시작, 인간의 시작, 언어와 문명의 시작, 그리고 죄에 대한 시작으로 인간의 역사는 비극으로 출발합니다. 모든 것이 등을 대고 갈등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버리고, 미워하고 갈등하며 증오하다가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화합이 아니라 분열과 파괴였습니다. 기쁨이 아니라 괴로움과 슬픔이었습니다. 그 후 창세기 12-50장까지는 실패로 돌아간 역사를 다시 고쳐서 새 역사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도, 이 민족이 강인한 민족이 되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약 430년간 이집트의 노예로 보내셔서 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고센 땅에서 시작된 애굽의 노예적 수난은 민족 역사의 자궁과 같은 역할입니다. 단순한 노예의 서글픔을 씹는 아픔의 세월이 아니라 장차 그 민족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꿈이 영글어 가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불러내어 40년의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이것도 훈련입니다. 아직까지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지에 들어가기에 부족했기 때문에 훈련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 후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허락하시고 거기에서 정착해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여호수아를 거쳐 이제는 사사라고 하는 지도자가 나와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의 정치제도는 완전한 신정정치였습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Theocracy' 사상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대동맥처럼 이어졌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나라이기보다는`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중심으로 묶인 힘으로 이루어 나갔습니다.

 

최근의 사회학적 연구에 의하면 이 사사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평등한 사회였다는 겁니다. 물론 중앙집권의 힘이 있긴 했지만 철저히 각 지파가 독자적인 결정을 하는 지방자치제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민주사회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언제나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평탄할 때는 좋았는데 미디안, 암몬, 모압 같은 왕권 조직을 갖춘 나라에게 공격을 받을 때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바다의 백성(Sea People)'이라는 블레셋의 침공으로 공동체가 치명적 붕괴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에서 요구하는 것이 `당신이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주시오'라는 것입니다. 즉 저 철기문화를 가진 블레셋을 이기기 위해서는 왕조체를 형성하고 기드온 같이 전쟁에 탁월한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드온의 대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대를 다스릴 것도 아니요, 내 자손이 그대를 다스릴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을 다스릴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라"

여기에서 우리는 기드온의 위대성을 발견합니다. 지도자가 아무리 유능하고 탁월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우리의 노력들이 허사입니다.

 

유능한 지도자 100명 보다 하나님 한 분이 일 하시는 게 더 쉽습니다. 왕이 있으면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하면 태평성대가 오는 걸로 착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얻은 뒤에도 얼마나 많은 도탄과 역사의 시련 속에서 아파했습니까?

민주주의란 사상이 현재로서는 인간에게 제일 좋다고 합니다만 이것이 실현된다고 해서 무엇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민주주의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정치력이 아무리 탁월해도 절대빈곤을 추방할 수 없고 죄악의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영생의 문제, 내세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은 여러 가지 갈등과 모순의 문제들, 비합리와 비본질적인 문제들이 어떻게 정리되고 해결되겠습니까?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인간의 손에 움켜쥔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갖다 놓아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이기심으로 하는 것도 예수님의 영으로 거듭나고 그들의 가슴에 선하고 정직한 영이 들어가면 가능합니다. 학원의 폭력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주님의 성품으로 채워질 때 좀 더 인애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무장한다는 말은 인격으로 무장된 인격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이란 감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감정이 있긴 있지만 인격과 이성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와서 선한 쪽으로 사용됩니다. 지금 우리의 혼란과 무질서는 이성의 판단보다는 소위 욱하는 감정의 발로가 앞장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대학생을 파이프로 때려죽인 일이 결코 계획된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불행한 일입니다. 학생들이 총리를, 한 나라의 재상에게 폭행을 가한 일도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정이 잘못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너무 흥분을 잘합니다. 지금이야 말로 말도 하지 말고 침묵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말이 너무 많고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가 없습니다.

 

조용히 날개를 접어야 할 때입니다. 언어의 날개를 접어 봅시다. 생각의 날개도 접어 봅시다. 그리고 기도 속으로 들어갑시다. 이 땅도 하나님만이 통치해 주십사고, 이 땅에 많은 정치가가 있으나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사실 기드온만 왕으로 옹립되는 유혹을 받은 게 아닙니다. 기드온은 이 무서운 권력의 유혹을 뿌리쳤는데 예수님도 비슷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일을 기억하시죠? 저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다 주겠다고 마귀가 속삭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한 말입니까?

 

이건 보통 사람에게는 지극히 매혹적인 유혹입니다.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한강의 기적이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민족과 인류를 빈곤에서 해방시킬 수 있고 아무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만 예배하라"

 

인간의 손으로 섣불리 통치를 하고 사람의 지식이나 권력을 행사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 이겁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섬기면 거기에서 문제의 해결을 얻고 지각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1장에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필요 없고 정치가 없어야 한다는 무용론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론입니다. 이 사람이 왕이 되니까 하나님이 뭘 해줬으면 좋겠느냐고 하니까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 저는 부귀영화도 구하지 않고 원수의 목도, 장수의 복도 구하지 않고 오직 지혜를 구하겠습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네 뜻이 갸륵하구나 그러니 지혜와 지식도 주고 부귀영화도 주리니 너 같은 임금이 전무후무하리라"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주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간구하는 백성, 그의 지도자에게는 하나님이 기대 이상의 귀한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나서 이스라엘은 가장 큰 영토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합쳐서 대영토를 이룬 것처럼 솔로몬 왕 때 이스라엘의 영토가 제일 넓었습니다. 오늘 정치하는 사람이나 우리 백성이 시급하게 드려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그건 지혜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정치인은 백성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올바른 삶을 구분할 수 있고 선과 악을, 선한 가치와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란 올바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간구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항상 사람의 생각과 반대되는 게 많습니다. 먼저 구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나중에 모든 걸 주신다고 합니다.

 

사회심리학에 `매슬로우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욕망을 단계적으로 설명합니다. 맨 처음 이루고 싶은 게 경제적 욕구입니다. 일단 배고프면 못 산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배가 부르고 살만하면 남을 부리고 싶은 권력의 욕구가 생기고 그러다가 이름을 날리고 싶은 명예심이 싹틉니다. 그 후에야 도덕이고 종교고 어떤 이상적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매슬로우란 심리학자는 인간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잘 발견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맨 꼭대기에 있는 가치부터 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만 위해 살다가는 그걸 다 구할 수도 없고 구하다 구하다 마음과 몸에 병들고 오히려 삶을 단축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면 자연히 삶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변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적 파트너로 삼고 싶어 하시는데 이건 신앙의 인물들이 많이 일어나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위정자들이 올바르고 정직한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이 등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그 뜻을 이루도록 주님 앞에 헌신된 사람들이 한 나라 공동체에 얼마나 있는가?' 이것이 그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입니다. 이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으면 그 공동체와 그 역사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의 미래를 하나님 앞에 신뢰함으로 맡겨야 합니다. 개인이고 공동체고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미래에 대해 불확실하고 그래서 가슴 조이고 하루하루의 시간을 긴장과 스트레스로 보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맡기지 못하니까 그럽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 내 경제적인 고난과 염려도, 자식들에 대한 염려도, 새 삶의 절박한 문제도, 이 민족의 위기와 미래의 문제도 주님께 다 맡깁시다.

 

그리고 주의 뜻을 기다리며 오직 기도합시다. 여호와가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기드온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귀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 주일예배설교] 추수감사절의 유래(출 23:14-17)

안녕하세요.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예배 설교 중에서 추수감사절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추수한 것에 감사하여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절기를 지켰습

drn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