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요한복음 5장 헬라어 강해] 베데스다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요 5:1-9)

두란노 서원 2021. 4. 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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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베데스다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가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병자를 찾아오셔서 고쳐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도 38년 된 병자처럼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를 씻겨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항상 주님께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데스다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요 5:1-9)

 

1절 메타 타우타 엔 헤오르테 톤 이우다이온 카이 아네베 호 이에수스 에이스 히에로솔뤼마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바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개월 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 날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50일을 말함이다(16:9-12). 칼빈(Calvin)은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과 6:4와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더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2절 에스틴 데 엔 토이스 히에로솔뤼모이스 에피 테 프로바티케 콜륌베드라 헤 에필레고메네 헤브라이스티 베데스다 펜테 스토아스 에쿠사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을 영국 왕역(A.V.)은 "양의 시장"(Sheep market)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3:32, 1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본서의 저자 사도 요한이 이 문의 이름을 정확히 표기한 것은 베데스다의 정확한 위치를 밝힘과 동시에 이 일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스위밍 풀 (swimming pool), 즉 수영하는 못이었으므로 그리 깊거나 위험하지 않은 곳이었다. ‘못’으로 번역된 ‘콜륌 베드라’는 ‘수영하다’ ‘뛰어들다’는 뜻을 가진 동사 ‘콜륌바오’에서 유래하였다. 이 못은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아서 뛰어들어가 수영 하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한편 본절이 베데스다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있는데(에스틴)’ 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한 점에 대하여 논란이 많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쓸 당시 이 베데스다 못이 양문 곁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예루살렘은 A.D. 70년 로마의 디도 (Titus) 장군의 공격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이러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혹자는 이 표현을 들어 이 부분이 A.D.70년 이전에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1 세기 후반기에 본서가 요한에 의하여 쓰였다는 사실과는 모순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요한이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현장 속에 실제 동참하여 생생 하게 감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현재형 통사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절 엔 타우타이스 카테케이토 플레도스 폴뤼 톤 아스데눈톤 튀플론 콜론 크세론 에크데코메논 텐 투 휘다토스 키네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절 앙겔로스 가르 카타 카이론 카테바이넨 엔 테 콜륌베드라 카이 에타랏센 토 휘도르 호 운 프로토스 엠바스 메타 텐 타라켄 투 휘다토스 휘기에스 에기네토 호 데포테 카테이케토 노세마티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3,4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B, C, D)에는 3절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한 사본들(A, C )에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 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이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라고 하였고(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 PP.342-343), 고데이(Godet),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라고 하였고, 헨드릭센(Hendriksen)은 말하기를, "이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所信)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P.191).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 이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 이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 ,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그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5절 엔 데 티스 안드로포스 에케이 트리아콘타오크토 에테 에콘 엔 테 아스데네이아

요 5: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팔"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며 고생한 사실(2:14)을 연상하면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40년이란 연수를 채용하지 않았으랴?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동안이라고 더욱 많이 말한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 그 연수는, 그때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그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시된다(A.Marack).

6절 투톤 이돈 호 이에수스 카타케이메논 카이 그누스 호티 폴륀 에데 크로논 에케이 레게이 아우토 델레이스 휘기에스 게네스다이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지를 한 번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그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신다. , (1) 그의 마음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에서 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그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떠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눅 4:25-27). 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7절 아페크리데 아우토 호 아스데논 퀴리에 안드로폰 우크 에코 히나 호탄 타라크데 토 휘도르 발레 메 에이스 텐 콜륌베드란 엔 호 데 엘코마이 에고 알로스 프로 에무 카타바이네이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 죽는다.

이 병자의 대답에서 두 가지 사실이 확인된다. 하나는 실제로 물이 동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때에 매우 치열한 생존 경쟁의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는 점이다.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못으로 가려 애썼기 때문에 연못 물이 동할 때면 아마도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 모여 있는 환자들만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의 절박한 상황과 더불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 타인의 심각한 사정보다는 자신의 것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의 암울한 현실을 잘 반영한다.

한편 이 부분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러나 내가 가고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내 앞에 내려가고 있습니다’가 된다. ‘동안에 (while)’로 번역된 ‘엔 호’는 장소를 가리킬 때에는 ‘그 안에서 (wherein)’라는 뜻이 되지만 시간을 가리켜서 쓰이게 되면 ‘~ 동안’ , ‘~하는 한’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엔 호’는 ‘이런 처지에 있어서’ 혹은 ‘이런 환경 하에서’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의미를 본절에 적용할지라도 무방하다.

8절 레게이 아우토 호 이에수스 에게이라이 아론 톤 크랍바톤 수 카이 페리파테이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절 카이 유데오스 에게네토 휘기에스 호 안드로포스 카이 에렌 톤 크랍바톤 아우투 카이 페리에파테이 엔 데 삽바톤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5:8,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이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준다. 주님의 병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는 저렇게 완전하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병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던 그를 불쌍히 여기신 주께서 이제 그에게 아주 놀라운 명령을 내리셨다. 그 명령은 단계적인 세 가지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일어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에게이레’는 현재 명령형이며 이 경우에 ‘일어 나라(get up)’ 와 ‘오라 (come)’는 의미를 지닌다.

이 동사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하거나(약 5: 15),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마 10:8)을 나타낼 때에도 쓰였다. 38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한 이 사람 침상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는 이 사람에게 내려진 ‘일어나라’는 명령은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의 역사는 많은 경우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이와 같은 엄숙한 명령과 이에 대한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 나타난다. 둘째는 네 자리를 ‘들라’라는 것이다. 

‘들고’에 해당하는 ‘아론’은 ‘아이로’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이 동사는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뿐 아니 라 ‘메고 가다’ ‘운반하다 (carry along)’ ‘가지고 가다 (take)’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따라서 주의 이 명령은 ‘네가 지금까지 의지하던 네 침상을 이제는 거두어서 메고 가라’는 것이다.

이 동사는 히브리어 ‘나사’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셋째는 ‘걸어가라’라는 것이다. ‘페리파테이’는 현재 명령형이며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 (walk around)’는 것이다. 따라서 ‘걷다 (NASB. NIV, walk)’라는 번역은 다소 의미가 약하다. 또한 현재 명령형이 사용된 것은 주께서 이 사람에게 계속해서 돌아다녀 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도록 명하셨는데 이 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이 병자의 삶 속에 들어왔다. 우리는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명령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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