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6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 사건을 마치시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너무나 심해서 오고 가도 못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그러면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바다에서 큰 환난의 파도를 만나면 스스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환난을 보면서 두려워할 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환난을 잠재워 주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 시간 문제를 해결 받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요 6:16-21)
16절 호스 데 옵시아 에게네토 카테베산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에피 텐 달랏산
요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 -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하였다(마 14:22). 그가 그렇게 그들을 지도하신 목적은, 그 자신이 홀로 떨어져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마 14:23). 그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때를 도리어 위기(危機)로 보시고 기도에 열중하셨다. 이것이 그의 특이하신 점이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심이다. 사람들은 인기가 올라갈 때에 그것을 성공으로 알고 안심한다.
17절 카이 엠반테스 에이스 토 플로이온 에르콘토 페란 테스 달랏세스 에이스 카페르나움 카이 스코티아 에데 에게고네이 카이 우크 엘렐뤼데이 프로스 아우투스 호 이에수스
요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6:17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 그가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은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때에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때에 예수님 없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때에 예수님을 더 믿었어야 될 것이었다.
‘이미 어두웠고’에 해당하는 ‘스코티아 에데 에게고네이’에서 ‘에게고네이’는 ‘기노마이’의 과거 완료 시제로 제자들이 바다로 나가는 동안 이미 어두워져서 지척을 분별하기가 어렵게 된 것을 나타낸다. 이미 캄캄하게 된 상태가 지속된 한밤중이었음이 이미(에데) 란 부사와 더불어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오신 시점이 밤 4경, 즉 새벽 3-6시 사이임을 밝히는 반면 요한이 예수께서 아직 그들에게로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 캄캄하게 되었다는 이 묘사만을 한 것은 상당히 암시적인 표현이다. ‘우포’는 시간에 관한 부사로 ‘아직 ~아니 (not yet)’라는 뜻이다.
요한은 그들이 지금 바다를 건너는 중이었고 주변은 캄캄한데 예수께서는 아직 오시지 않았음을 묘사함으로 그들의 불안한 상태를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이 자기들에게로 오시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다음 날 목적지인 가버나움에서나 그분을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바다 북단을 가로지르는 거리는 불과 8km 내외였지만 이때 제자들이 처한 상황은 아주 좋지 못하였다.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마 14:24)는 마태의 기 록이 보여 주듯이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고난을 당하더라’는 말 ‘바사니조메논’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들의 현재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나타낸다. 본절에서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란 표현은 제자들이 주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18절 에 테 달랏사 아네무 메갈루 프네온토스 디에게이레토
요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지중해보다도 682 피드나 낮은 갈릴리 바다에는 사방 높은 언덕 사이의 골짜기로부터 강한 바람이 뜻밖에 불어오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풍랑 중에 있는 것은, 마치 교회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음과 같다. 예수님은 얼마 동안 그 배로 찾아오시지 않았으나, 마침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와 같이, 환란 중에 있는 교회도 마침내 주님의 권고로 말미암아 평안해진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그리고 그 잔잔하던 바다가 요동하고 있었다’이다. ‘파도’로 번역된 ‘달랏사’는 ‘바다 (NASB. sea)' 나 ‘호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일어나더라’고 번역된 ‘디에게이레토’는 ‘디에게이로’의 미완료 시제 수동태로 잔잔하던 바다가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NASB. began to be stirred up). 이 단어는 그들이 처 음 출발할 때는 바다가 매우 잔잔했음을 보여 준다.
사태의 반전을 나타내는 접속사 ‘테’가 쓰인 점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난다. 평온하던 바다에 파도가 일어난 것은 큰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실제 갈릴리 바다는 서쪽의 지중해와 동쪽의 시리아 사막 가운데 있었으며 또한 주위의 낮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때로 이상 기류가 발생하기 쉬웠다. 특히 갈릴리 바다에서 형성된 대기와 시리아 사막에서 형성된 대기가 부딪쳐 이상 기류가 발생할 때는 예기치 못한 돌풍이 발생하곤 하였다. 당시에도 이러한 돌풍 현상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어두운 밤에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으며 예수가 계시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들의 불안감이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다.
19절 엘렐라코테스 운 호스 스타디우스 에이코시펜테 에 트리아콘타 데오루신 톤 이에순 페리파툰타 에피 테스 달랏세스 카이 엥귀스 투 플로이우 기노메논 카이 에포베데산
요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어떤 학자들은, "바다 위"란 말이 해안을 의미한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러 오신 것이 아니고 바닷가의 언덕으로 걸어오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는 이적을 기록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1) 제자들이 두려워한 까닭이며, (2) 공관 복음의 동일한 기사가 이적을 기록하는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막 6:29; 마 14:26).
20절 호 데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고 에이미 메 포베이스데
요 6: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내니"란 말은, 예수님께서 그때에 자신의 현림(現臨)하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啓示)하심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안전과 평안이 있다.
‘내니’로 번역된 ‘에고 에이미’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서술하실 때에 사용하신 독특한 문구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이 진술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절대적인 신성을 직접 나타내는 가장 순수하고도 완전한 표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요 4:26 ; 6:35.48.51; 8:12.28.58; 13:19; 14 :6 ; 15: 1. 5; 18 :37). 그분은 ‘에고 에이미’라는 독립된 용어를 통해서 그 자신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대리자로 계시하신다.
하지만 이 용어가 예수님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약의 ‘나는 ~이다’(출 3: 14)에서 온 것이며 이 용어를 통해 자기를 나타내신 분은 여호와이시다.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 그 장본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불안감은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위대성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곤경과 불안감에 빠진 그들의 귀에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주었으며 그들이 곤경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그분은 곤경에 처하여 불안해하는 성도들을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므로 그분의 음성을 듣는 자마다 새롭게 모든 환경에 도전할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
21절 에델론 운 라베인 아우톤 에이스 토 플로이온 카이 유데오스 토 플로이온 에게네토 에피 테스 게스 에이스 헨 휘페곤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6:21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여기 "배는 곧"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배는 초자연적으로 순조롭게 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연계를 통솔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 하셨다.
원문대로 정확히 번역하면 ‘그러므로 그들이 그분을 배안으로 영접하기를 기뻐했다 (NASB They were willing therefore to receive Him into the boat)’ 가 된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와 동사는 ‘델로’의 미완료 과거 시제 3 인칭 복수인 ‘에텔론’이며 이 동사는 ‘바라다’, ‘원하다’, ‘기꺼이 ~하다’라는 뜻이다.
또한 한글 개역 성경에서 본 동사처럼 번역한 ‘영접하니’ 즉 ‘라베인’은 ‘람바노’의 부정 과거 부정사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그들을 괴롭히던 모든 상황은 그치고 배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거친 풍랑이 잠잠해지고 그들은 마침내 가려던 목적지에 무사히 이르게 되었다. 이는 예수의 임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보여 준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법칙은 바로 그분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예수님과의 동행은 안전한 인생 항해를 통해 무사히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확실한 보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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