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갈라디아서 2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바울 바나바 디도의 예루살렘 방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삼 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제는 십사 년이 지난 후에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바울 바나바 디도의 예루살렘 방문(갈 2:1-5)
1절 에페이타 디아 데카텟사론 에톤 팔린 아네벤 에이스 히에로솔뤼마 메타 바르나바 쉼파랄라본 카이 티톤
갈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첫 번째 방문은 그가 회심한 지 삼 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행 9:26), 두 번째 방문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행 11:29,30), 세 번째 방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 하러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행 15:1 이하).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차 방문인지 삼차 방문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라진다. 먼저 두 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Bruce, Calvin)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행 15장의 세 번째 방문은 공적 회의에 참석한 것이지만, 2절에 의하면 바울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를 만났으므로 세 번째 방문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행 15장에는 디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절에는 디도와 바나바가 동행(同行)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 구절의 방문은 세 번째 방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본절의 '다시'를 두 번째 방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는, 만일 1:18에 기록된 방문이 첫 번째 방문이라면 문맥상 본 구절의 방문이 두 번째 방문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진다. 다음으로 세 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Berkhof, Eerdman, Findlay, Robertson). (1) 행 15장과 본장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인데, 두 곳 모두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다루고 있다. (2) 행 15장에서 지도자들 간의 연합을(행 15:8,9) 강조하고 있는데, 본장에서도 동일하게 연합을 서술하고 있다(9절). (3) 행 15장이나 본장이 모두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주장하고있다.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본절이 말하는 바울의 방문이 세 번째 방문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공의회의 연대를 A.D. 49년경으로 보고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연대를 추정하면 1차는 A.D. 35년, 2차는 A.D. 46년(행 11:30; 12:25), 3차 방문은 A.D. 49년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만일 본장의 방문을 2차 방문과 연결시킨다면 바울의 1차 방문은 A.D. 46년에서 14년 전인 A.D. 32년이 되며 또한 그가 회심한 시기는 그보다 3년 전인 A.D. 29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때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이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 (2) 두 번째 방문을 주장하는 자들은 디도에 대한 언급이 행 15장에 없다는 이유로 세 번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디도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누락되어 있다.
(3) 바울이 두 번째 방문을 생략한 것은 무슨 속임수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는 본장에서 다른 주제,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취급한 두 번째 방문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4) '다시'(팔린)는 두 번째를 뜻하기도 하지만 요 18:27에서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두 번째'를 의미하는 헬라어 '듀테론'을 쓰지 않고 '팔린'을 사용한 것은 단지 방문의 반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바나바 - 그는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구브로에서 태어나 바울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으로서 이방인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었다(행 11:22).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권위자', '권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바'로 불렀다(행 4:36).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소(행 11:24) 초대 교회의 헌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바울의 체험을 변호하며 함께 사역하였으나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울과 결별(訣別) 하게 되었다(행 15:36-41).
디도 - 그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서 고린도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이다(고후 8;23; 12:18). 본절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등장하는 그는 바울이 '나의 참 아들 디도'라고 말할 만큼 바울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록은 그가 로마에서 달마디아로 갔다는 것이다(딤후 4:10).
2절 아네벤 데 카타 아포칼륍신 카이 아네데멘 아우토이스 토 유앙겔리온 호 케륏소 엔 토이스 에드네신 카트 이디안 데 토이스 도쿠신 메포스 에이스 케논 트레코 에 에드라몬
갈 2: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2
계시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아포칼륍신'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어떠한 인간적인 동기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준다. 한편 행 13장에서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을 위해 파송되는 과정이 안디옥 교회의 결정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이 교회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본절에서 언급된 바, 바울의 선교 사역의 동기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결정 배후(背後)에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Hendriksen)
달음질하는 것 - 바울은 개종 이후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당시의 운동 경기를 염두에 두어 묘사하였다. 그의 달음질은 향방 없는 것이 아니라(고전 9:26)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도자들을 사사로이 만나는 면밀한 계획을 갖기도 하였으며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결국 변하거나 바울의 달음질을 헛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으므로 본절에는 바울 자신이 유대주의자들의 모든 거짓된 것들을 반드시 고치고야 말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절 알르 우데 티토스 호 쉰 에모이 헬렌 온 에낭카스데 페리트메데나이
갈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2:3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명령하셨다(창 17:10-14).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의 언약적인 의미보다는 종족적이며 문화적인 우월감의 상징으로서 외적인 할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급기야는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함께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조했다.
한편 '억지로...아니하였으니'의 헬라어 '우데...에낭카스데'는 할례를 주장하는 강한 압력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바울의 굳건한 의지를 나타낸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회유(懷柔)에 말려들어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한 상황에서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디도를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디도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4절 디아 데 투스 파레이사크투스 프슈다델푸스 호이티네스 파레이셀돈 카타스코페사이 텐 엘류데리안 헤몬 헨 에코멘 엔 크리스토 이에수 히나 헤마스 카타둘로손타이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2:4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 '거짓 형제'의 헬라어 '프슈다델푸스'는 '프슈데스'와 '아델포스'의 합성어이다.'프슈 데스'는 '거짓 사도'(고후 11:13), '거짓 선지자'(벧후 2:1) 등에서 처럼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파레이사크투스'('가만히 들어온')와 함께 이 말을 사용하여 은밀하고 은근하게 복음을 훼손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바울이 1:11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본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속에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들은 최소한 내부에서 믿음을 배반한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Lenski).
아마 '거짓 형제'는 (1)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며 모세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자들이거나 (2) 공의회의 결과가 갈라디아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되었다(행 15: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에는 계속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여 열심은 있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였다(고후 11:26; 벧후 2:1).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 가운데서 디도가 할례 받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 얻은 자로 하여금 자유를 잃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5절 호이스 우데 프로스 호란 에익사멘 테 휘포타게 히나 헤 알레데이아 투 유앙겔리우 디아메이네 프로스 휘마스
갈 2: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2:5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 복종을 요구하던 자는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던 무리들로 국한시켜 이해하기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의미에서 유대 주의화를 꾀하던 '거짓 형제'들이 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도 바울 일행은 위의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어떤 서방 사본들에서는 '호이스우데'('...한 자들에게 조금도...않다')가 생략되어 본 구절이 '잠시 동안만 복종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사본에 의하면 바울이 잠시 동안만 평화를 위하여 타협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베자(Bezae) 사본을 제외한 모든 언셜(Uncial) 사본과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46), 그리고 고대 헬라 교부의 번역에서 '호이스 우데'는 생략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장의 문맥상 바울이 거짓 형제들과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할례는 초대 교회의 최대 논쟁이며 또한 복음에 대한 최대의 도전(挑戰)이었다. 이 논쟁 앞에서 바울이 진리를 양보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Lenski).
복음의 진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알레데이아 투 유앙겔리우'는 본절과 14절에만 나오는 것으로 '결함이 전혀 없는 복음'(Lightfoot) 또는 '진리가 담겨 있고 진리에 속해 있는 복음'(Burton)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복음을 들어 언급하는 것은 디도의 할례 문제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문제에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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