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0장에서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여 주신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고 능력받아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의 축복(사 40:18-31)
18-31절, 참 하나님을 섬기라
[18-20절]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 . . .
이사야는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선지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명 없는 우상을 비교한다. 우상은 보통 놋쇠로 부어만들고 금으로 입히고 은사슬로 장식한다. 놋쇠와 금은을 살 여유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나무를 택하여 그것을 공교한 장인으로 조각하게 하여 우상을 만들었다. 현대인도 여전히 조상신을 숭배하여 제사나 차례를 드리며 심지어 부적을 소지하기도 한다. 죽은 선조의 영혼이 자손들에게 복과 화를 내리겠는가? 부적 종이조각이 특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또 현대인은 인간을 숭배하고 자신을 높인다. 그들은 과학을 숭배하고 돈과 육신의 쾌락를 최고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들에게 참 평안과 행복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신이 될 수 있는가?
놋쇠, 금은, 돌, 나무 등으로 만들어지는 우상이 생명이 없고 능력이 없으며 그런 것을 섬기는 행위가 헛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 인간과 돈과 육신의 쾌락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원시적 우상들이나 현대적 우상들이나 그 어떤 우상도, 또 인간이 절대적 가치를 두려 하는 그 어떤 피조물도 헛되고 무익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살아계신 창조주, 섭리자 하나님을 어떻게 감히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21-22절]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 . . .
이사야는 또 말한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遮日)[휘장]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신 자이시다. ‘궁창’이라는 원어(쿠그)는 ‘둥근 원[궤도], 둥근 천장’이라는 뜻으로 하늘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초월적 존재이시다. 그는 하늘에 계신 자이시다. 땅의 거민들은 그 앞에 메뚜기 같아 보인다. 그는 하늘을 휘장같이 펴셨고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다. 그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자이시다. 창조주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시다(렘 10:11). 또 하나님께서는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귀인들을 폐하시고 세상의 재판관들을 헛되게 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25-26절]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 . . .
이사야는 또 말한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그는 피조 세계로부터 초월해 계신다. 그의 존재 자체가 초월적이며 그의 도덕성이 이 불결한 세상과 구별되신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세상을 홀로 섭리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을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수효대로 이끌어 내셨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셨다. 그의 능력이 크고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이 창조되었다. 이 세상의 어느 신, 어느 우상이 이런 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졌는가?
[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 . . .
이사야는 또 말한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낙심된 마음 상태를 지적하며 그들을 위로하려 한다. ‘내 사정’과 ‘내 원통한 것’은 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을 말한다. 그들은 죄 때문에 당연히 고난을 받지만,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을 갈망하며 그들을 학대하는 이방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정한 보응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깊은 뜻 가운데 자기 백성을 고난 중에 버려두시고 잊으신 것처럼 보인다. 그는 때때로 그러하셨다(시 13:1-2).
[28-29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 . . .
이사야는 또 말한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가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스라엘 백성은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피곤치 않으시고 명철과 능력이 무한하신 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명철과 능력으로 그 선하신 뜻을 다 이루신다.
[30-31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 . . .
이사야는 또 말한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스라엘 백성은 특히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피곤하고 낙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실수하거나 낙심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며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려가고 곤비치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상숭배가 헛됨을 알자. 놋쇠나 나무로 만들고 금은을 입힌 우상은 아무 생명이 없다. 제사와 차례도 헛되고 가증한 우상숭배임을 알자. 또 돈 숭배와 인간 숭배와 육신의 쾌락 추구도 헛된 것이다. 우리는 헛된 우상숭배를 버리자. 인간 숭배, 돈 숭배, 육신의 쾌락 추구를 버리자. 그것들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하고 참 평안과 행복도 주지 못한다.
둘째로, 우리는 참 하나님만 섬기자. 태초부터 계셔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섬기자. 그는 명철과 능력이 무한하시며, 피곤치 않으시는 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신을 증거하셨다. 그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그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고 섬기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날마다 새 힘을 얻자. 이스라엘은 고난으로 피곤해졌고 낙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앙망하며 새 힘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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