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1편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복 있는 자여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도 않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도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면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이런 자가 복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복을 받은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처럼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항상 주님의 복음을 따라 살면서 영육으로 복을 받아 모든 일들이 형통하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 있는 자여!(시편 1:1-6)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1절은 아쉐레이 하이쉬 아쎄르 로 할라크 바아차트 레솨임 우베데레크 하타임 로 아마드 우베모샤브 레침 로 야솨브입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1
복 있는 사람 - 시편은 이처럼 서두(序頭)를 '복'이라는 말로써 시작한다. 히브리어 '아쉬레이 하이쉬'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이다. 즉, '아쉬레이'는 '올바르다', '번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솨르'에서 유래된 복수 명사의 연계형인데, 여기에서는 감탄사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떤 명사가 뒤따르는 단어와 의미상 소유격 관계에 놓일 때 앞의 명사를 연계형으로 만들어 '...의'로 해석한다. 한편 구약 성경에서 '복'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는 '바라크'와 '아솨르'가 있다.
먼저 '바라크'는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415회 정도 나오는데 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거나(창 1:22;2:3; 12:2; 17:16; 22:17;25:11;35:9;민 6:27; 대상 13:14; 말 3:10), 신적 권위를 가진 대리인에 의한 축복 선포 때 사용되었다(창 27:4; 47:9; 출 39:43; 신 1:11; 삼하 19:39). 이 단어는 또한 복을 간구하거나 축원할 때에도 사용되었다(3:8; 왕상 1:47; 잠 3:33). 이처럼 '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간의 산업과 후손과 육체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편, 70인 역에서는 이 '바라크'를 '율로기아'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아쉬레이'로 사용되었는데 구약에 총 44회 중 시편에 26회, 잠언에 8회가 나오고, 전도서에서는 각 1회씩 나온다(욥 5:17;전 10:17). 이 단어는 신 33:29에서 맨 처음 나오는데 성문서 외에는 왕상 10:8; 대하 9:7; 사 30:18; 32:20; 56:2; 단 12:12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아솨르'는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 인간이 고백 혹은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Weiser). 한편, 70인 역에서는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이 '마카리오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이다(Kittle). 따라서 구약 지혜 문학의 첫 권인 시편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선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람'의 히브리어 '이쉬'는 원래 남성을 뜻하는 단어이다(창 2:23).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바, 여성도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Luther). 특히 사람이란 단어는 그 앞에 정관사 '하'(the)가 붙은 단수인 반면 복이란 단어는 복수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에는 누구든지 야훼의 율법에 따라 사는 그 사람만이 여러 형태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복을 기원하는 큰 탄성으로 시편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열면서 그러한 복을 누릴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사'는 '유죄한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Kraus, Twot).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차'이다. 이 말은 의도, 도모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임'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길(율법)을 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
오만(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침'은 '조롱하다', '비웃다'는 뜻의 동사 '루츠'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조롱하는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한다(Kraus). 이들이 조롱하는 말들은 73:8-11; 사 28:15; 말 3:14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세 동사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좇다'(할라크), '서다'(아마드), '앉다'(야솨브)는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해 주고 있다(Weiser). 다시 말해서 죄의 성질이 점점 더 악화됨을 이 용어들의 배열을 통해 알 수 있다.
2절은 키 임 베토라트 아도나이 헤페초 우베토라토 예흐게 요맘 바라옐라입니다.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2
1절이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했다면, 본절은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 -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흔히 모세 오경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의 계시라는 점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교훈 또는 훈계라는 의미를 가지며 아울러 하나님의 교훈은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어도 본시가 전체 시편의 서문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 용어는 모세 오경뿐만 아니라 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Kraus, Craigie).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이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 의인의 특성이다. 그 특성은 (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2) 계속적으로 그 율법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수 1:8). 여기서 '즐거워하여'라는 말은 의인이 토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뻐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은 바로 의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삶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이다(112:1). 한편, '묵상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는 '묵상하다'는 뜻 이외에 본래 '말하다', '속삭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로 볼 때, 의인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하게 암송한 듯하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계속해서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함을 의미한다.
3절은 베하야 케에츠 솨툴 알 팔게 마임 아쎄르 피르요 이텐 베이토 베알레후 로 이볼 베콜 아쎄르 야아세 야첼리아흐입니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1:3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이는 의인의 복된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즉, 의인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항상 기쁨을 공급받는 상태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다 비유한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언제든지 생수를 공급받는다. 여기서 '시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라그'는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간헐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로(水路)를 말한다. 여기 이 나무는 심긴 나무다. 샤탈 동사는 분사 수동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으로 누군가가 나무를 시냇가에 심어 놓았다. 하나님도 나를 주님 곁에 심어 놓았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 갈증을 내지 않을 수 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 '시절을 좇아'란 문자적으로 '그의 때에'이며 이는 곧 인생의 추수기를 의미한다. 나무가 추수기에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을 멀리하고(1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누리는 의인은 인생의 추수기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열매는 추수기에 맺히는 열매이므로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는 악인들의 열매와는 달리 완전히 익은 열매임에 틀림없다(Calvin). 이처럼 의인의 행복은 인간의 잔재주로 인해 얻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건의 노력을 통해 얻는 완전 무결한 행복인 것이다. 열매를 맺는데 나탄 동사인데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계속해서 의인은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4절은 로 켄 호르솨임 키 임 카모츠 아쎄르 티드페누 루아흐입니다.
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4
1-3절에 묘사된 의인의 행복과는 대조적으로 악인의 실패 및 불행을 기록한 부분이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곡식을 까 부를 때 낱알은 지면에 떨어지나, 겨는 가볍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따라서 여기서 '겨'란 악인의 사라져 버리고 말 허무성을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개념은 3절의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견고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 겨는 성경에서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는 말로서 많이 언급되어 있다(35:5; 욥 21:18; 사 5:24; 17:13; 29:5; 33:11; 41:15; 렘 23:28; 단 2:35; 호 13:3; 습 2:2; 눅 3:17).
5절은 알 켄 로 야쿠무 레솨임 바미쉐파트 베하타임 바아다트 차디킴입니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1:5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 여기서 '심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공의' 또는 '심판'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또한 '견디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쿰'은 '서다', '일어서다'라는 뜻이다. 이 두 용어에 대해 다음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미쉬파트'를 공의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공의 가운데 서지 못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즉, 악인은 의인의 공의로운 일에 동참하지 못하며(Craigie) 또는 의인들의 공의 앞에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다는 해석이다(Calvin). (2) 혹자는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이 세상 마지막에 있을 최후 심판 때에 서지 못하는 것, 곧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iggs).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악인이 하나님의 '율법'(토라)을 대적하는 악인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악인을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해석한 (2)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최후의 심판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심판의 사역을 행하시고 있기 때문이다(Kraus).
죄인이 의인의 회중(會中)에 들지 못하리도다 - 여기서 '의인의 회중'이란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들의 총회를 말한다. 이들은 곧 1, 2절에 묘사된 바와 같이 소극적으로는 악인의 사상과 행동에서 구별된 자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이를 생활화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모여하는 일은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111:1; 118:19, 20). 그리고 15편은 이 거룩한 곳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밝혀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다'는 '지명하다', '...에서 만나다', '두다'는 뜻의 동사 '야아드'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장소적인 개념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다'는 거룩한 장소, 곧 하나님의 언약궤가 모셔져 있는 성소나 성전을 지시하는 것이며 또한 최종적으로 메시아께서 모든 성도를 불러 모으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것이다(Kraus). 의인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회중에 들어가나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6절은 키 요데아 아도나이 데레크 차디킴 베데레크 레솨임 토베드입니다.
시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1:6
의인의 길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복과 악인의 멸망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의인의 복과 악인의 멸망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의인을 인정하시므로 그가 복을 받는 것이며 반대로 악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멸망을 당한다. 이처럼 시인은 이 시구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Weiser). 한편, 여기서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소멸하다'라는 뜻으로 악인의 최후를 암시한다. 즉,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다. 칼 단순 능동형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영원히 멸망할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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