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전도서 7장 주석강해설교]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전 7:1-29)

두란노 서원 2021. 10. 28.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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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기자는 생활 가운데 필요한 참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과 행동을 지혜롭게 하여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는 영적 지혜가 있어야 하고 육적인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영적 지혜는 구원받는데 필요하고 육적 지혜는 이 땅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갖추어 하나님께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대조됨(전 7:1-29)

 

[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 . . .

본문은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이름이란 사람이 죽은 후에 그에게 붙여지는 이름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의 이름이다. 그것은 오래 남는다. 보배로운 기름은 값비싼 향유를 가리킨다. 그것은 잠시 동안은 좋은 향기를 낸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적인 향기에 불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라지고 없어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올리운 자로 기억되며,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기억된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기억되며,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한 자이며 형통함을 얻은 자로 기억된다. 다윗은 믿음과 찬송의 사람으로 기억되며, 히스기야는 경건한 자로 기억된다. 저들은 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있다.

본문은 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죽는 날은 사람이 일생을 마감하는 날이다. 의인은 그의 의로운 생을 정리하고 결산하며 그의 이름을 남기는 날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셨다. 죽는 날은 또 의인이 죄와 슬픔, 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나 출생하는 날은 사람이 생을 시작하는 날로서 어떻게 살지 미지수이다.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면 그의 생이 복되지만, 믿음 없이 살고 죄만 짓고 살면 그의 생은 큰 화가 된다.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던 제게 좋을 뻔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는 보배로운 기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귀히 여기자. 단지 생일을 축하하지 말고 믿음으로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죽기를 사모하자.

[2-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 . .

본문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잔칫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 죽음의 문제를 생각할 기회가 없고 경건하고 바른생활, 근신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초상을 당한 집에 조문하러 가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죽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유익이 많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해지며, 죽음을 생각할 때에 죄악 된 일,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일, 양심에 거리끼는 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버릴 것이다.

본문은 또,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이 웃을 때는 자기 부족과 연약을 잊어버리고 죽음의 일도 잊어버리기 쉽고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죽음을 대비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해 슬퍼하고 죽음의 문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탁할 때 심령에 은혜와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특히 회개의 슬픔은 유익이 많다.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5:4).

그러므로 본문은 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우매자들은 잔칫집에 빠지지 않고 모여든다. 그들은 현재의 육신적 즐거움을 좋아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지혜자들은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더욱 가다듬게 되고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참석하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며 내세를 준비하자.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죄악 된 일을 멀리하자.

[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한다. 책망을 좋아하는 자가 없고 책망 자체는 듣는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겁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바른 지적과 책망은 결국 유익을 줄 것이다. 책망을 들은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고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6:2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라고 말하였고, 잠언 27:5-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라고 했다. 또 옛날부터 참 선지자는 책망의 설교를 하였다. 예레미야 28:8-9,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행치 않고 불경건과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매자의 노래는 듣기는 좋으며 마음을 즐겁게 할지 모르나 유익이 없다. 그것은 전도서 2:2에서 전도자가 웃음을 논하여 미친 것이라고 표현하고 희락을 논하여 저가 무엇을 하는가고 한 것에 딱 맞다. 아모스 6:5,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유다 백성이 비파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거렸다고 증거 하며 책망하였다.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풍성한 평안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유행가 같은 우매자의 노래를 좋아하지 말자. 우리는 오히려 지혜로운 종들과 동료들과 이웃들의 책망과 권면을 좋아하자.

[6-7]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 . . .

본문은, “[이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매자의 노래소리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더 나은 이유를 보인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는 일시적으로는 요란하지만 곧 그친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요란스러워도 무가치하고 허무하다.

본문은 또,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탐학이라는 원어(오쉐크)압제, 토색[강제로 빼앗음], 토색으로 얻은 이익을 뜻한다(BDB). 이것은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빼앗는 이익을 가리킨다. 이것은 일종의 탐심이다. 성경은 탐심을 정죄하며 경계한다. 디모데전서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라고 말한다.

롯의 아내는 재산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다(19:26). 아간은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탐하다가 그 가족과 함께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7). 게하시도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탐하다가 나병에 걸렸다(왕하 5).

또 뇌물은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는 악한 것이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우리는 의롭게 번 적은 소득이 복됨을 알아야 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매자의 기쁨을 버리고, 또 토색과 탐심, 또는 뇌물을 멀리하며,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정직하게 번 소득으로 살아가자.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본문은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큰 일, 좋은 일이라도, 일의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일 뿐, 그 일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일이 잘 안 되어서 오히려 해가 되거나 수치가 될 수도 있다. 일의 끝은 일이 성취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잘 계획하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잘 진행하고 치명적 실수를 막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잘 이기고 완성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일을 잘 성취하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또 인내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 노력과 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낙심치 않고 오래 참은 자들이다. 농부도 밭 갈고 씨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고 김매고 병충해 막고 이렇게 참고 일해야 추수하게 될 것이다. 직장인도 겸손히 참고 일을 배우고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커서 취직하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삶 전체가 그러하다. 겸손과 인내는 인생의 성공적의 삶의 필수적인 덕이다.

신앙생활도 비슷하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성공적인 신앙인을 묘사하시기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라고 하셨다(눅 8:15). 야고보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라고 교훈하였다(5:7-8). 믿음은 인내를 수반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하자.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겸손과 인내로 행하면 잘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이치가 비슷하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로 주를 섬기자.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본문은,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라고 말한다. ‘마음이라는 원어는 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영의 활동이다. 우리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한 노가 있다. 불의를 보고 노하는 의분은 정당성이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가 있다(1:6). 예수께서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 의분도 있다(2:15). 핍박하는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호소한 시편의 글들도 이런 의미에서 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지나치고 잘못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은 미련한 자가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고(12:16) 속히 노하며(14:17) 그 노를 다 드러낸다(29:11)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1:20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인내의 한 면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며(14:29) 슬기로운 자라고 말하고(19:11), 또 그런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다(16:32). 또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5:44).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아니한다고 말했고(고전 13:4-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라고 교훈하였고,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라고 하였다(4:26, 31-32).

우리는 쉽게, 급히 노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며 우매자의 행위임을 명심하자.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자.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본문은,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비교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도 단편적인 이야기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역사에는 항상 이면적 이야기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옛날이 오늘보다 나았다는 불평 어린 평가를 버리자. 실상, 옛날에도 어려운 일들은 있었을 것이고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현실을 겸손히 긍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현재 어떤 부족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생각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면 우리는 즉시 회개하며 그것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지만, 만일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이 주신 훈련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돌보심을 구해야 할 것이며, 또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성결하게 살면서 미래의 평안을 기대하며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이 많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의 징책하심보다 크시다. 사사기는 111년의 징계의 햇수와 296년의 평안의 햇수를 증거 한다.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셨고(여호와 이레)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셨고(만나와 메추라기) 우리를 인도하셨고(불기둥과 구름기둥) 이곳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에벤에셀).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현실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하자.

[11-12]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 . . .

본문은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라고 말한다. ‘햇빛을 보는 자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부모로부터 받는 유업과 유산은 물질적 유여함을 주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지혜가 이와 같이 아름답고 유익하고 좋다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은 “[이는]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라고 말한다. 본문은 지혜와 돈이 다 보호하는 것이 되지만, 지혜가 돈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돈이 있으면 영양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고 편안한 집에서 살 수 있고 몸이 아프면 좋은 의사와 약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 돈이 있으면 자녀도 좋은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이처럼 돈은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자녀를 보호하는 점이 있다.

이와 같이, 지혜도 우리를 보호한다. 지혜는 잘못된 빚보증을 하지 않게 함으로 재산을 보호한다. 지혜는 우리를 게으르지 않게 함으로 가난으로부터 보호한다. 지혜는 교만하여 서로 다투지 않게 함으로 인간관계를 보호해준다. 무엇보다, 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해주며 우리의 자녀도 보호해준다.

본문은 특히 지혜가 우리의 생명을 주고 그것을 보존한다고 말한다. 지혜는 영생의 길이다. 지혜를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죄를 버리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게 한다. 잠언 3:13-18, 지혜가 정금보다 진주보다 귀하며 그 오른편에 장수가, 그 왼편에 부귀가 있고 그 길은 즐거움과 평강의 길이며 마침내 생명나무의 열매 곧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혜가 부모의 유산보다 더 귀함을 깨닫고 그것을 사모하며 소유하자.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악을 버리며 계명에 순종하자.

[13-14]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 . .

본문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섭리자이시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7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욥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욥기 1:21,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것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잠 3:6).

본문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은 내일의 일을, 아니 다음 순간의 일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좋은 날과 힘든 날,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뒤섞어 두셔서 장래 일을 짐작치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4:14).

본문은 특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형통하고 좋은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곤고한 날, 즉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부족이 없는지, 죄가 없는지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시편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반성할 기회를 삼고 회개하고 말씀을 순종케 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인정하자. 특히 곤고한 날, 어려운 일이 있는 날에는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생각하자.

[15-18]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 . . .

본문은,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長壽)하는 악인이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의인이지만 아벨처럼 다른 사람의 미움과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있고, 악인이지만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교묘히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내버려 두심으로 장수(長壽)하는 자도 있다.

본문은 그러므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사람 앞에 드러내는 의는 외식적, 율법주의적, 바리새인적 의가 되기 쉽다. 또 그런 사람은 자신을 크게 여기고 남을 정죄하기 쉽고 그러면 주위 사람들의 반감을 더 쉽게 살 것이다.

본문은 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적당한 악인이 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성을 가진 죄인이지만, 드러난 악인은 사회적 제재를 당하고 감금을 당하고 벌을 받고 심한 경우는 사형도 당한다. 그런 악인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본문은 또한,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라고 말한다. 너무 드러나게 의를 행하고 의인인 척하지도 말고, 또 너무 드러나게 악을 행해서도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이런 잘못들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의를 행해도 은밀히 하고 드러날 경우도 자랑치 말고 높은 마음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또 물론 드러나게 악을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

[19-20]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본문은 지혜의 가치와 지혜의 유익을 증거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잠언이 말한 그 지혜인 줄 안다. 그것은 세상적, 육신적 지혜가 아니고, 신적, 천적, 영적 지혜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고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즉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함으로 증진되는 것이다.

지혜는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한다. 성읍의 유사 즉 성읍의 관원은 세상에서 지혜와 권세가 있는 자이다. 그는 보통 일반 사람들보다 기억력, 판단력, 언변, 용기가 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성읍의 열 유사보다 더 지혜롭고 더 능력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되었다고 체험적 고백을 하였다(97-100).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 지혜가 바벨론의 박사들보다 열 배나 더 나았다(1:20).

본문은 “[왜냐하면]( י󰗑)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없음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참 지혜가 열 유사보다 나은 이유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왕들도, 관원들도 다 죄인이며 부족한 인생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권세 있는 자라도, 자신의 무지와 편견과 아집을 이길 수 없고, 세상의 악한 풍조를 이길 수 없고, 마귀의 시험이나 죄의 유혹을 피하거나 이길 수 없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적 지혜가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범죄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지혜를 귀하게 여기자.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만 사모하고 순종하자.

[21-22]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 . . .

본문은,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친구의 의견과 충고를 들을 필요가 있다. 나라의 통치자는 백성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자는 실수하기 쉽고 독선적이고 편협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모든 말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말들에는 항상 잘못된 말, 부정적인 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무엇을 확신하고 용기를 가질 수 없고 낙심하여 아무 일도 못하기 쉽다. 사람들의 말만 듣는 자는 어린이 동화의 이야기처럼 결국 당나귀를 지고 가는 자와 같이 될 것이다.

느헤미야 6장에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위해 유대 땅에 총독으로 왔을 때,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은 그를 대적하였고 그를 해치려 하였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하고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그것은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의 손을 피곤케 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오늘날도 사탄은 하나님의 종들을 낙심케 하여 하나님의 바른 일을 못하게 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사역에서 매 맞음, 갇힘,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등 많은 고난을 받았고 또 영광도 얻고 욕도 들었으며 악한 이름도 얻었고 아름다운 이름도 얻었으나(고후 6:5-8) 낙심치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여 그 뜻을 행하는 것이다(5:15-17).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조금 들을 필요는 있으나 그 모든 말에 마음을 쓸 것은 없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믿고 행하자.

[23-24]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 . .

본문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 세상의 모든 일들 곧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솔로몬은 인간적 지혜로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힘썼고 인간적으로 지혜자가 되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 지혜에 이르지 못했고 참 지혜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라는 말에 무릇 된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 이유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 이치와 그 이유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고 파악하기에 너무 멀고 너무 깊다고 고백한다. 사람으로서 그것을 능히 통달할 자가 없다고 깨달은 것이다.

본문은 사람의 지혜의 한계성 곧 인간의 무지함을 증거 한다. 사람이 무엇을 다 아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또 하나의 무지(無知) 일뿐이다. 사람이 우주만물에 대해 가진 지식은 지극히 미미하고 지극히 단편적인 것일 뿐이다. 우주는 사람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광활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파악할 수 없이 높고 깊으시다. 여기에 인간의 겸손과 참 경건의 시작이 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천년은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다고 고백하였다(90:40. 이사야는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라고 증거 하였다(사 40:15, 17).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해 인간의 무지함을 깨닫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히 엎드리며 그를 섬기자.

[25-26]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 . . .

본문은,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마음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다”라고 말한다. 후반부의 원문은 어리석은 것 곧 미련한 것과 정신없는 것(혹은 미친 것)의 악이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어리석고 악한 일들, 정신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솔로몬은 그 모든 일들을 살피고 연구하고자 하였다.

본문은 또,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말한다. 남자가 아내를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어진 아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그 값은 진주보다 귀하다(19:14; 31:10). 그러나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줄 같은 여인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죄악과 사망으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런 여자를 사망보다 독한 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의 실패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나이 늙었을 때 왕비들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다(왕상 11:4). 그는 잠언에서 다투는 여인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고 말하였고(19:13; 27:15) 그런 여자와 큰 집에 살기보다 광야나 지붕 모퉁이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21:9, 19). 그런 여자의 남편은 마음에 큰 고통을 당하고 결국 불행에 이른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라는 원어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KJV, NASB, NIV)’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그런 여인을 피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는 그에게 잡혀 결국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올무 같은 자가 되지 말고 선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자가 되어 마귀의 시험을 피하자.

[27-29]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 . .

본문은,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고 인생에 대해 깨닫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질 수 있는 지혜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본문은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천 명의 남자들 중에 겨우 한 명을 찾았고 천 명의 여자들 중에서는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여자들은 아마 그가 거닐었던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첩들을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실상, 온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참 지혜자이시다. 그의 모친 마리아까지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비천한 죄인에 불과하다.

본문은 또,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원문--‘그들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라는 원어(퀴쉬보노스)고안들, 계획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본래 정직하게 만드셨다. 사람은 본래 선도 악도 아닌 중성 상태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그것이 의와 거룩의 하나님 형상이다(4:22-24).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많은 꾀를 내었고, 많은 악한 고안들과 계획들을 내었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8:21,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사람은 본래의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며 성화이다.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죄성을 이겨야 한다.

[사무엘상 2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12-17)

 

[사무엘상 2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12-17)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먼저 손을 대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지만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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